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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택 문화산책] 얼차려!

입력 2019. 09. 05   15:44
업데이트 2019. 09. 10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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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현 택
국립중앙박물관 디자인전문경력관·작가
박 현 택 국립중앙박물관 디자인전문경력관·작가


부처님의 공간, 절을 지키는 수문장이 있다. 금강역사다. 눈을 부라린 채, 끝이 포크처럼 생긴 몽둥이-금강저(金剛杵)를 들고 서 있다. 금강저는 고대 그리스 신들의 대장인 제우스의 무기나 인도 신화에 나오는 ‘바즈라(Vajra)’와 같은 것으로 곧 ‘벼락(번개)’을 말한다.

부처님 앞에서 어설픈 짓거리를 하다간 금강저로 머리통을 한 대 맞는다. 벼락을 맞는단 말이다. 벼락을 맞으면 어찌 될까? 죽는다. 내 존재가 산산조각이 난다. 산산조각이 난다는 것은 육신은 물론 내 의지와 욕망과 번뇌가 한 방에 박살 난다는 얘기다. 박살 나면? 다시 나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 다시 세우는 것이 혁(革)이다. 혁은 본래 가죽을 말하지만 바꾼다는 뜻도 있다. 타성에 젖은 껍질을 벗겨내고 새로워지는 것이 혁신(革新)이다. 혁명·혁파·개혁 또한 모두 기존상태를 깨부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얼마나 아프고 힘들까? 결코 쉽지 않다. 더욱이 혁의 본질은 타(他)가 아닌 아(我)를 깨부수고 바꾸는 것이다. 금강역사가 당신에게 바로 혁의 기회를 보시하는 것이다.

그러니 금강역사는 부처님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헛된 망상으로 점철된 뭇 영혼을 박살 내는 것일 뿐이다. 망상과 집착이 박살 난 곳이 바로 부처님의 자리며, 박살 내는 것이야말로 법을 지키는 시발이다. 금강역사는 험악한 얼굴과 벼락 몽둥이로 당신의 정신을 깨뜨리고 일깨워주기 위해 그곳에 서 있다. 카프카도 『변신』의 서문에서 “책이란 무릇, 우리 안에 있는 꽁꽁 얼어버린 바다를 깨뜨려 버리는 도끼가 아니면 안 되는 것”이라고 했다.

군인들에게는 ‘얼차려’라는 것이 있다. 상관이나 선임들이 기합을 주는 것이다. 얼차려는 ‘얼을 차려라’를 줄인 말로 사전에 따르면 ‘기율을 바로잡기 위해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비폭력적 방법으로 육체적인 고통을 주는 일’이다. 그렇다면 ‘얼’은 무엇인가? 사람은 혼백(魂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둘이 분리되면 죽음의 상태가 된다. 죽으면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땅으로 스며든다. 우리말로는 혼을 ‘넋’이라 하고, 백을 ‘얼’이라 한다. 넋은 하늘로 올라가기 때문에 ‘넋을 잃다’ ‘넋 나갔다’라고 쓰고, 얼은 땅으로 내려가기 때문에 ‘얼빠졌다’라고 쓴다.

얼은 ‘정신의 중심’이며, 얼굴이란 정신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통로(굴)라는 의미다. 그래서 얼굴의 모습이나 표정이 무엇보다 중요한 거다. 한편, 어떤 잘못을 저질렀을 때 ‘혼내준다’고 하는데 이 말은 ‘넋이 나가게 한다’는 것으로, 혼내준다는 것은 그야말로 엄청난 짓을 하는 거다. 그러니 조심해서 혼내야 한다. 그럼 ‘차려’는? ‘차리다’에서 나온 말로 ‘몸과 정신을 똑바로 한 채, 양다리는 곧게 펴고 무릎은 붙이는 동작’을 말한다. 모든 군인은 알고 있다. ‘차려 자세’는 군인의 기본자세라고. 결국, 얼차려란 아래로 슬금슬금 빠져나가려는 얼을 제자리에 똑바로 붙들어 두겠다는 것이다. 특히 군인은 정신을 늘 제자리에 붙들어놓고 있어야 한다. 그러니 때때로 얼차려도 필요하겠지?

부처님을 보러 가든, 책을 읽든, 얼차려를 받든 잊지 말아야 할 점은 내부로부터 변화를 향한 자신의 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말짱 헛짓이라는 것이다. 자~ 지금껏 멍 때리고 있었다면 이제 “얼차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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