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제1차 세계대전과 인플루언서 마케팅의 기원
프로이트 조카 에드워드 버네이스
언론 통해 마음 움직이는 법 터득
美 윌슨 정부 공공정보위원회 활동
참전에 부정적인 여론 설득 작업
전쟁 후 프로파간다 기법 사업화
3자 입장 광고 인플루언서와 비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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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인플루언서 마케팅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인플루언서’란 소셜미디어에서 유명해져서 사회적 영향력이 큰 사람들이다. 무엇보다도 동영상 플랫폼 유튜브는 인플루언서들의 등용문으로 자리매김했다. 청년 실업률이 높은 시대이다 보니 기업에 취업하기보다는 유튜브 채널을 열어서 인플루언서가 되겠다는 대학생도 적지 않다. 실제로 인플루언서가 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만, 수십만 구독자를 거느린 인플루언서가 되면 상당한 경제적 수익도 기대할 수 있다. 유튜브 인플루언서들은 웬만한 방송국보다 더 많은 구독자를 확보하고 있다. 어린이 장난감을 소재로 유명해진 보람튜브의 광고 수익이 한 지상파 방송국 광고 수익을 능가한다고 해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토록 인플루언서들이 운영하는 채널이 인기가 많은 것은 왜일까? 개인맞춤형 니치(niche·틈새) 마케팅, 딱딱하지 않고 일상적인 포맷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생산자 입장에서 제품을 광고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 입장에서 제품을 사용한 소감이나 품평을 올린다는 것이다. 기업 입장에서 제작한 광고는 제품의 좋은 측면만 때로는 과장해서 보여준다는 인상을 주며 신뢰성이 떨어진다. 반면, 인플루언서는 기업이라는 이해 당사자가 아닌 일반 소비자라는 제3자 입장에서 제품의 장단점을 비교하기 때문에 더 신뢰할 수 있다. 물론, 이를 남용해 공정한 척하면서 실제로는 조작된 정보를 내보내는 인플루언서들도 있지만 말이다.
소셜미디어 덕분에 인플루언서 마케팅이 유행이지만 그 기원은 적어도 100년 정도 거슬러 올라간다. 에드워드 버네이스(Edward Bernays, 1891~1995)는 PR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오스트리아 출신 미국인 버네이스는 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조카다. 버네이스의 어머니는 프로이트의 여동생이었고, 프로이트의 부인은 버네이스 아버지와 남매였다. 젊은 시절 버네이스는 모든 대화에 무의식과 같은 프로이트의 이론을 끌어들였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버네이스는 무의식적으로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달인이었다. 버네이스는 대학을 졸업하고 언론을 상대하는 일을 하면서 언론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방법을 터득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버네이스는 윌슨 정부가 만든 공공정보위원회에 채용됐다.
윌슨 대통령이 미국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을 호소했을 때 미국 여론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미국의 1차 대전 참전은 미국이 유럽 상황에 간섭하지 않을 테니 유럽도 미국에 간섭하지 말라는 미국의 전통적인 외교정책인 ‘먼로 독트린’과 배치되기 때문이다. 이에 윌슨 정부는 반대 여론을 누르고 미국의 참전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 내기 위해 공공정보위원회를 창설했던 것이다. 공공정보위원회의 주된 역할은 선전 혹은 프로파간다였다. 프로파간다는 흔히 허위 정보나 가짜 뉴스를 유포시킴으로써 적이나 아군을 기만하는 부정적인 것으로 이해되지만 1차 대전 당시에는 단순한 기만전술이 아니었다. 오히려 당시에는 사실적 정보를 전쟁에 유리하도록 조직해 사람들을 설득시키는 것이 프로파간다였다.
공공정보위원회는 미국이 참전한 1917년부터 휴전에 돌입한 1919년까지 2년 동안 운영됐는데, 버네이스는 공공정보위원회에서 사용된 프로파간다 기법들을 정부기관이나 기업들이 널리 활용할 수 있다고 봤다. ‘전시에 국가를 위해 사용했던 방법을 평화 시에 기관이나 국민을 위해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을 그는 깨닫게 됐다. 버네이스는 본격적으로 프로파간다를 사업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하는 일의 명칭도 공중 관계(public relations)로 바꿨다.
버네이스가 벌였던 PR 활동의 사례는 많은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여성 흡연 관련 활동이다. 버네이스의 고객 중에는 미국 담배회사가 있었다. 담배회사의 고민은 여성용 담배를 개발하고 여성 모델을 고용해 광고해도 여성흡연율이 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담배회사의 의뢰를 받은 버네이스는 프로이트의 제자 중 한 사람과 이 문제에 대해 상의한 끝에 여성 흡연율이 저조한 이유는 ‘담배=남성’ 이미지가 굳어져 있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한때 한국도 담배는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졌으며, 대학생 미팅에서 여성 흡연은 흔한 논쟁 거리였다). 1929년 버네이스는 이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 뉴욕 시내에서 캠페인을 조직했다. 부활절에 뉴욕 자유의 여신상을 떠올리는 ‘자유의 횃불’ 행진을 조직하고 여성 흡연을 금기시하는 사회적 터부에 도전하도록 만들었다. 이튿날 뉴욕타임스는 이를 1면 기사로 보도했고, 여성 흡연을 둘러싸고 성 평등 문제를 사회적 의제로 부각했다.
버네이스의 PR은 이해 당사자가 아닌 제3자에 의한 마케팅 기법의 전형적인 사례다. 많은 사람이 신뢰할 수 있는 사람 즉, 인플루언서를 통해 우회적으로 의제를 던지고 호소하는 방법은 오늘날 상당히 보편화됐지만, 당시로서는 참신하고 기발한 발상으로 받아들여졌다. 이후 버네이스의 기법은 정치에도 많이 활용됐는데 이것이 때로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1990년 15살의 쿠웨이트 소녀는 병원에서 자원봉사하는 동안 이라크 군인들이 인큐베이터에 있던 아기들을 꺼내 차디찬 바닥에서 죽도록 내버려뒀다고 미국 의회에서 증언했다. 이는 이라크에 대한 미국 국민의 폭발적인 분노를 자아냈고, 사막의 폭풍 작전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2년 뒤 그 소녀는 주미 쿠웨이트 대사의 딸로 밝혀졌고 증언 내용도 거짓임이 드러났다. 허위 증언이 탄로 나자 여론은 전쟁에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김선호 한국언론진흥재단
선임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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