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독립군의 전설 김좌진

청산리대첩 전투 장소에 청산리는 없다?

입력 2019. 08. 20   15:54
업데이트 2019. 08. 20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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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제4부, 아! 청산리대첩 ⑦ 청산리는 어디인가?


당시 청산리는 마을 용어 아냐
삼도구 골짝 상류지역 일컬어
청산리대첩비 서있는 청산촌은
1932년 동포들이 재건한 마을

 
실제 전투지역은 어디?
백운평에서 시작 어랑촌·서구 등
화룡 일대 모든 전투 포함 상징어
북로군정서 전투 위해 행군한 거리
송림평서 싸리밭촌까지 30리 정도

 

싸리밭촌의 현재 모습. 뒤로 백운평전투 현장인 베개봉이 훤히 보인다. 필자 제공
싸리밭촌의 현재 모습. 뒤로 백운평전투 현장인 베개봉이 훤히 보인다. 필자 제공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머루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랏다, 얄리얄리얄랑셩 얄라리 얄라….” ‘악장가사’에 실려 전해지는 고려가요다. 작자나 연대를 모른다고 무슨 흠이 될까. 아리랑에 필적하는 입에 익은 노래거늘. ‘청구’는 나라 이름이고 ‘청산’은 우리 땅의 별칭과 다름없는 익숙한 용어다. 이 입에 익은 낭만적 단어가 거친 북만주에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 있다. 그렇다. 역사가, 그리고 동포들이 입안에서 굴리며 만든 지명이기에 그렇다.

우리가 아는 ‘청산리대첩’의 명칭이 왜 청산리대첩인지 독자 제위께서 자문해 보시기 바란다. 청산리에서 일어난 전투이기 때문에 청산리대첩이라 명명했다고 답을 한다면 유감이지만 오답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청산리대첩의 전투 장소에 청산리는 없다. 청산리대첩 당시 청산리는 마을을 칭하는 용어가 아니었다.

행정적으로 말하자면 지적(地籍)상 명기된 지명이 아니다. 다만 원래부터, 우리 동포들이 삼도구 골짝의 상류 지역을 일컬어 ‘청산리골짝’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멋들어진 이름을 얻은 곳이 베개봉 아랫골짝 동네다. 현재 화룡시 삼도구진에 ‘청산촌’이란 이름으로 존재하기는 한다.

그러나 이 마을은 1932년에 동포들이 다시 모여 재건한 마을이다. 현장에는 아마도 북만주에 있는 우리 민족의 항일투쟁 기념비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화강암 탑이 웅장하게 서 있다. ‘청산리대첩비’다. 그 비석이 있는 동네가 청산촌이다. 매년 숱한 이들이 찾는 곳이다. 백두산 관광길에, 혹은 일부러 답사를 오는 이들도 적지 않다.


중국 길림성 화룡현 청산촌 임장 내에 세워져 있는 청산리대첩기념비. 필자 제공
중국 길림성 화룡현 청산촌 임장 내에 세워져 있는 청산리대첩기념비. 필자 제공


이곳을 다녀간 많은 사람들이 청산리대첩 현장에 다녀왔노라고 오인한다. 오인의 원인은 이렇다. 진짜 청산리대첩 현장은 접근성이 나빠서 그곳까지 이동하기가 어렵다. 특히 천수평이나 어랑촌, 갑산촌 등지는 모르는 사람도 많고, 관광 길과는 먼 지방도 한편에 치우쳐 있기 때문에 그냥 이쯤해서 현장 방문이라 하자는 마음이 그렇게 만들었다. 심지어 관련 연구자들조차 현장답사를 제대로 해본 이가 몇이나 되는지 의문이다. 그런저런 이유로 청산리대첩은 청산리대첩비가 서 있는 장소에서 치러진 전쟁이라 여겨지게 됐다. 현재의 청산촌에 서 있는 청산리대첩비가 한몫 거든 것도 무시할 수 없다. 아쉽다. 그래서 진짜 영웅들이 피를 적신 청산리대첩의 현장은 늘 외롭다.

청산리대첩을 처음 알린 김훈의 『북로아군실전기』에는 ‘청산리 산림’ 혹은 ‘청산리 서북단’이라는 장소가 나온다. 김훈의 입을 빌려 기사화한 임정의 독립신문에는 ‘청산리 부근’이라고 전투 장소를 명기했다. ‘청산리대첩’이란 용어를 처음 기술한 이는 ‘철기 이범석’이다. 중국 시안에서 광복군 2지대장을 맡고 있던 시절 중국어로 ‘방랑의 정열’을 쓰며 상기한, ‘대첩’에 방점을 둔 말이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쳐 이 승리를 뭉뚱그려 ‘청산리대첩’으로 부르게 됐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청산리대첩은 백운평에서 시작해 천수평, 어랑촌, 맹개골, 만기구, 서구, 천보산전투와 홍범도부대의 남완류구, 고동하곡전투에 이르기까지 화룡 일대에서 벌어진 모든 전투를 포함하고 있다. 명량에서 벌어진 전투를 ‘명량대첩’이라 하고 백마고지에서 벌어진 전투를 ‘백마고지전투’라 부르지만 청산리전투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청산리골 첫 교전 이후 화룡 일대에서 벌어진 6일간, 10여 회의 전투’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말이 된다.

‘청산리’란 지명을 처음 언급한 김훈의

『북로아군실전기』 내용이다. “10월 19일 밤에 아군은 ‘송리평’에서 출발하여 거기서 60리 되는 ‘싸리밧촌(싸리밭촌)’에 도착해 몇 시간의 잠을 청하고 있던 중 적군 200여 명이 ‘평양촌’(‘송리평 상촌’이니 피아의 거리가 20리)까지 쫓아 들어왔소. 아군은 싸리밧촌에서 한때의 식량을 준비하여 ‘청산리 산림’ 속에서 20리를 몰래 행군하여 산림 중에서 하룻밤을 노숙하고 다음날(즉 20일)에 이르러서는 휴대하였던 식량이 다하였으므로 그날은 굶게 되었소. 적은 벌써 싸리밧촌에 도착하였습니다.” 청산리가 우리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기사다.

여기에 나오는 지명을 순서대로 나열하면 이렇다. 송리평, 평양촌(송리평 상촌), 싸리밧촌, 청산리 산림 20리 순이다. 송리평은 지금의 송월촌을 말한다. 원래 이름은 송림평(松林坪)이다. 김훈의 병력이 송림평에 있을 때 김좌진과 사령부는 나월평(羅月坪)에 있었다. 두 마을은 1㎞ 정도 떨어져 있었는데 점차 마을의 규모가 커지면서 하나로 합쳐졌다. 그래서 새로 얻은 이름이 지금의 송월촌이다. 그 송월촌에서 지금도 존속하고 있는 십리평까지는 2㎞ 정도다. 십리평에서 평양촌까지는 약 3㎞, 평양촌에서 싸리밭촌까지는 약 2.5㎞, 그리고 싸리밭촌에서 백운평까지는 3㎞ 정도다. 『화룡지명지』 등 관련 책자를 검토하며 필자가 직접 답사해 본 결과다. 다시 말해 북로군정서가 첫 전투를 위해 행군한 거리인 송림평에서 싸리밭촌까지 60리는 너무 멀다. 정확하게 30리 정도다. 산골과 계곡을 따라 걷는 행군길이기에 그리 느꼈을 것으로 이해는 된다.

한편, 일본군의 기록에 의하면 북로군정서는 삼도구의 청산리북구에서 갈라지는 그 아래의 ‘백운평(약 50,60호쯤 되는 마을)’ 부근에 주둔하고 있었다고 한다. 물론 백운평에서 북로군정서와 교전하기 전까지는 일본군도 베개봉 아래 백운평 일대에 북로군정서가 매복하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전술했듯 지금의 청산리촌은 1932년 이후에 다시금 한인들이 모여들어 재건된 마을이다. 북로군정서가 이동할 때는 현재의 청산리에서 1~2㎞ 더 서북쪽으로 들어간 지역에 평양촌이 있었고 거기에서 다시 2~3㎞ 더 들어가면 마을 하나가 들어서기에 넉넉한 개활지가 나온다. 청산리대첩의 첫 번째 전투 장소였던 베개봉(枕峰山)이 훤히 보이는 마을이다. 그곳이 싸리밭촌이다. 김훈이 쉬면서 식량을 조달하고 일본군이 평양촌에 들어왔다고 첩보를 접한 곳이다. 그런데 평양촌까지 일본군이 들어왔다면 쉴 수가 없다. 바로 코앞이다. 아마 삼도구 골짝 초입에 일본군이 진입했다는 것이 와전되었거나 상황의 급박함으로 그리 오해했을 수는 있다.

아무튼 김좌진은 일전을 피할 수 없음이 확실해지자 병력을 백운평을 지나 ‘직소택(直沼澤)’ 부근으로 이동시켜 진용을 갖췄다. 직소택 일대는 지금도 ‘ㄷ’자 형태의 앙칼지게 가파른 막다른 계곡의 끝이다. 그 지역을 택해 적을 가두고 섬멸할 작정이었다. 지리와 천문을 지배하면 절대 지지 않는다. 전투의 기본 중 기본이다. 김좌진은 시간과 장소를 지배한 지휘관이었다. <김종해 한중우의공원 관장/ 예비역 육군대령>  


 

국방일보 창간 55주년·임정 100주년·청산리전투 승전 99주년 특별기획

‘독립군의 전설 김좌진’ 독후감을 공모합니다


국방일보-백야 김좌진 장군 기념사업회 공동 기획  


- 대상: 국군 장병 포함 전 국민
  - 작품 규격: 2000자 이내 한글문서(HWP)
  - 접수처: 인터넷 백야 김좌진 장군 기념사업회 홈페이지(이름, 소속, 계급, 명함판 사진, 연락처, 주소 기재 필수)
  - 접수 기간: 8월 16일부터 9월 17일까지
  - 시상식: 10월 18일
  - 문의: 백야 김좌진 장군 기념사업회 02-780-8877, 디지털국방일보팀 02-2079-3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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