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독립군의 전설 김좌진

“교전 피하자” 정했지만… 탁월한 계책 있었다

입력 2019. 08. 13   15:49
업데이트 2019. 08. 13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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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제4부, 아! 청산리대첩 ⑥ 피전책과 피할 수 없는 싸움


일본군과 교전 원치 않던 중국군
독립군 단체와의 연석회의 개최
북로군정서·홍범도 연합부대 참석
회의 결론은 中 의도대로 ‘피전책’


이미 포위망 형성한 일본군 맞서
싸움 준비하던 김좌진 고민 깊어져
연석회의 결과 수용하되
부득불 교전 형태 띠게 책략 짜

피전책이 채택됐던 ‘묘령회의’ 장소, 묘령촌. 지금도 온전히 동포마을이다.
피전책이 채택됐던 ‘묘령회의’ 장소, 묘령촌. 지금도 온전히 동포마을이다.


손자가 말했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선”이라고. 싸워보지도 않고 지는 것은 어떤 경우일까? 평화를 명분으로 헛발질하다 나라를 잃어버린 경우를 우리는 당해 본 나라다. 싸웠더라면 어떠했을까?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아픔도, 분단의 고통도 겪지 않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역사에 가정이 없다지만 자꾸 그런 가정을 해보는 것이다.
북로군정서가 사흘에 걸쳐 준비한 겨울 보급품을 챙겨서 이동한 곳은 화룡현 삼도구 북쪽, 묘령 부근의 서쪽 오지였다. 이때 이미 일본군 본대가 본격적으로 포위망을 형성하고 압박을 가해 오고 있었다. 이를 간파한 김좌진은 다시 병력을 삼도구 방향으로 인솔해 갔다. 이때가 10월 18일이었다. 일제는 정보보고를 남겼다. “북로군정서군 600여 명이 십리평에 주둔하고 있음.” 삼도구는 청산리계곡으로부터 송월평에 이르는 긴 골짜기의 지명이다. 그러나 그 지역 사람들은 송월평에서 지금의 청산촌까지를 삼도구로, 청산촌부터 백운평전투가 치러진 직소택 부근까지를 청산리계곡으로 부르기도 한다. 삼도구 입구에 위치한 마을이 송월평이며, 다음이 십리평이다. 그곳에 병력을 전개시켰다.

이 십리평은 ‘30회’에서 말했던, 하루를 묵은 장인진의 십리평이 아니고 현재 청산리 마을 전에 위치한 다른 십리평이다. 김좌진이 일단 십리평에 병력을 전개시킨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이 일대는 대종교의 교세가 대단히 강한 지역이었다. 다시 말해 왕청현 일대 못지않게 대중적 지지 기반을 획득하기에 용이한 지역이기도 했다. 그리고 외줄기 계곡이 뻗어 있고 들어오든 나가든 길은 한곳이므로 기동전을 펼칠 수밖에 없는 전장 상황에서 적합한 지형이 그곳이었다. 일단 병력을 전개시킨 김좌진은 차후 작전을 위해 제 독립군단체와 중국군의 연석회의 결과를 기다렸다.

‘묘령회의’로 불리는 이 회의는 중국군 사령관인 맹부덕이 주선했다. 당연히 교전하지 말고 빨리 지역을 벗어나길 원한다는 의도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이미 일본군이 화룡지역으로 전개를 마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독립군들의 입장에서도 통일된 노선을 다시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10월 19일, 묘령에서 연석회의가 개최됐다. 이때 모인 이들은 북로군정서와 홍범도가 지휘하는 ‘연합부대’ 지휘관들이었다. 연합부대는 10월 13일, 국민회·신민회·의민단·한민회 등 제 단체가 하마탕에서 회합하고 행동을 통일할 것을 합의하면서 만들어진 부대다. 묘령회의에 북로군정서 측에서는 부총재 현천묵, 연성대장 이범석, 그리고 김좌진의 비서였던 이정이 참석했고 연합부대 측에서는 홍범도, 안무, 계화 등 7명이 참석했다.


북로군정서가 1차로 진지를 편성한 청산리골 초입 라월평.
북로군정서가 1차로 진지를 편성한 청산리골 초입 라월평.


맹부덕의 전언은 김좌진에게 전달됐다. 그러나 김좌진은 병력을 전개해 전투상황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신 이범석과 이정을 보냈다. 아울러 부총재인 현천묵이 노구를 이끌고 같이 종군하고 있었기에 행정 차원이나 예우 차원에서 대표로 보냈던 것이다. 그런데 이 회의에서 누구보다 강력하게 ‘피전책(避戰策)’을 주장하여 관철시킨 이가 현천묵이었다. 일제의 기록이다.

“싸울 것인가 아니면 회피할 것인가 하는 두 개 파의 의론이 분분하다가 결국 현천묵 등이 주장하는 논지에 기초해 당분간 일본군의 공세를 회피할 것을 결의하였다. ‘훈춘사변으로 하여 일본군대가 출동함으로써 우리의 작전에 장애를 가져온 것이 심하다. 이제 간도에서 일본군대와 교전하면 그 승리는 알지 못하더라도 이로 인하여 중국 측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일본 측은 더욱 많은 군대를 증파할 것이다. 우리 실로 내외독립의 선봉으로서 광복의 맹아(萌芽)다. 싸울 시기는 멀지 않다. 지금은 참고 자중할 것을 요구한다.’ 이 피전책으로 김좌진은 송림동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울 준비를 하고 있던 부하들을 백방으로 달래 후방으로 퇴각하였다.”1 일제는 어떻게 이런 내용까지 수집하여 기록할 수 있었는지, 얼마나 독립군단체의 와해를 위해 집요하게 노력했는지를 알려 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김좌진의 고민은 깊어졌다. 적어도 총재부의 의견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 여겼을 것이다. 그리고 현천묵의 말대로 이제 맹아를 틔우기 시작했는데 미래를 위해 전투력을 보존하자는 의견도 영 틀린 말이 아니었다. 더욱이 중국 동북군이 요구하는 적확한 정답이 그것이기도 했다. 아마도 맹부덕의 의중을 고려한 주장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김좌진은 피할 수 없는 싸움이 도래한다는 사실도 이미 알고 있었다. 맹부덕 쪽에서 일본군에게 회의 결과를 알려주었을 개연성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일본군은 토끼몰이식 토벌전으로 나올 것이다. 여기에서 김좌진의 탁월한 책략이 빛을 발한다. 회의 결과를 수용하되 부득불 교전하는 형태를 띠게 한다는 것이었다. 김훈의 『북로아군실전기』가 그것을 증명한다.

“(전략) 피전책이 성립되었소. 일전을 하는 경우에는 아군은 들판의 전투를 피하고 산림 중으로 유인코저 하여 주력을 청산리 서북단 대삼림 내에 숨기고 약간의 병력으로 위장, 경계하여 감시하였소.” 이른바 치고 빠지는 유격전술로 아군의 피해는 최소화하고 적들에게는 공포와 전율의 전장이 되도록 하여 전투 효과를 극대화하자는 의도였다. 그래서 병력을 청산리대첩 첫 번째 전투 장소인 백운평 직소택으로 이동해 배치한다. 적들이 오는 길목을 지키고 있었지 도망가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리고 편의대를 보내 일본군을 유인하기까지 한다. 시간과 지형을 지배하는 지휘관은 결코 패하지 않는 법이다. 김좌진은 알고 대비한 지휘관이었다.

한편으로 아쉬움이 영 없지는 않다. 어차피 그럴 바에야 왜 묘령회의에서 제 단체를 통합한 작전계획이나 지휘체계를 구축하지 못했을까 하는 점이다. 단일 지휘체계를 통한 장기 유격전 등으로 일제를 서서히 파괴해 나가는 전략의 변화도 꾀할 수 있었을 터, 훗날까지 우리가 주도적으로 동북지역에서 항일의 불씨를 계속 살려 나갔다면 광복 후 동북삼성의 주인이 누가 되어 있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너무 멀리 간 말 같지만 중국공산당이 청산리대첩 이듬해인 1921년에 상해의 한 가정집에서 ‘동아리’처럼 만들어졌음을 상기해 보면 영 엉뚱한 상상만도 아니다 싶지 않은가?

그때 제 독립군단체 간의 이해관계는 복잡했고, 그 이해관계를 용해시킬 만한 대표성과 능력을 지닌 인물이나 단체가 없었다. 임시정부는 겨우 1년을 갓 넘겼고 특히, 상해는 너무 멀었다. <김종해 한중우의공원 관장/ 예비역 육군대령>

  
<각주> 

1 일제 ‘간도정보 제47호’, 불령선인의 행동, 1920년 10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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