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교양 스페셜리포트

[안동의 3·1 만세운동] 이상동 1인 시위로 ‘불길’..지역 곳곳서 ‘독립의 함성’

박영민

입력 2019. 08. 06   17:19
업데이트 2019. 08. 06   17:39
0 댓글

 


안동에서 처음 3·1운동이 일어난 안동장터 문화의거리.
안동에서 처음 3·1운동이 일어난 안동장터 문화의거리.

안동에서는 이상동(李相東)의 단독 시위가 기폭제 역할을 해 1919년 3월 17일 예안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처음 전개된 뒤, 3월 말까지 계속해서 격렬한 만세운동이 전개됐다. 처음 일본 유학생 강대극(姜大極) 등이 3월 12일 예안 장날을 이용해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했으나, 일제의 삼엄한 감시로 실행되지 못했다. 그러나 예안면장 신상면(申相冕) 등은 다음 장날인 17일에 전개하기로 재계획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제작, 등사했다. 3월 17일 오후 3시30분쯤 주동자들은 수천 명의 장꾼들을 동원해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행진했다. 시위군중은 오후 6시경 주재소로 몰려가 구금자 석방을 요구하며 투석으로 주재소를 파괴했다. 그러나 안동수비대에서 출동한 일본군에 의해 25명이 잡히고 해산했으며, 22일에 이루어진 2차 만세운동에서는 무차별 사격을 감행한 일본군과 투석전을 벌여 13명이 부상했다.

군내의 가장 격렬한 만세운동은 안동읍에서 전개됐다. 3월 18일 기독교인·천도교인 등 3000여 명의 시위군중은 군청·경찰서·지방법원 안동지청을 파괴, 방화하며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이를 제지하던 일본군의 사격으로 여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일제의 만행에 격분한 시위 군중은 23일 다시 관공서를 포위하고 투석했으며, 이때도 일본군의 야만적 발포로 14명이 현장에서 죽고 수십 명이 부상했다.

길안면에서는 손영학(孫永學)·김정익(金正翼)·김정연(金正演)·장두희(張斗熙) 등이 3월 21일의 천지(泉旨) 장날을 이용, 500여 명의 시위 군중을 이끌고 면사무소와 경찰관주재소를 습격 파괴했다. 이곳에서도 실탄 사격을 감행하는 일본 경찰과 투석전을 벌였다. 임동면에서는 유연성(柳淵成)·유동수(柳東洙)·이강욱(李康郁) 등이 3월 21일 편항(鞭巷) 장날에 10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행진을 전개했다. 이때 일본 경찰이 공포를 발사하자 분노한 시위 군중은 주재소를 습격해 서류와 기물을 파괴하고 그 안에 비치된 권총 등 무기를 빼앗아 우물에 버린 후 새벽 3시까지 만세운동을 계속했다. 그러나 안동에서 출동한 일본군에 의해 57명이 잡혀 옥고를 치렀다.


박영민 기자 < p1721@dema.mil.kr >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댓글 0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