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김성수 평론가의 대중문화 읽기

그럼에도…한글은 위대하다

입력 2019. 08. 01   17:06
업데이트 2019. 08. 01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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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우리가 진짜 보호해야 할 것 ‘나랏말싸미’ 논란



100억 원대의 제작비를 들여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과정을 담은 영화 ‘나랏말싸미’가 역사 왜곡 논란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다. 송강호의 명연기도 소용없고, 고(故) 전미선 배우의 유작이라는 타이틀도 소용없었다. ‘영화 자체의 완성도가 높다’ ‘오늘날 직면한 문제를 역사적 상황에 빗대어 표현해 냈다’는 전문가들의 객관적 평가도 역사 왜곡의 성난 물결 앞에선 아무런 힘이 없었다. 
 
영화를 봤는지 보지 않았는지 모르지만, 각 포털에 매겨지는 평점은 거의 테러 수준이다. 심지어 ‘친일 영화’라는 딱지를 붙이는 0점짜리 평점 글도 수두룩했다. 외국인들에게는 절대 보여줘선 안 될 영화라는 딱지를 붙이는 문화부 기자들과 대중문화평론가까지 등장했다. 이 정도면 영화 제작자들은 거의 범죄자가 된 모양새다.

하지만 역사학자들이나 한글 연구자들이 모두 인정하는 것처럼 영화는 허구다. 역사적 사실들은 이야기를 짜는 바탕이 될 뿐이고, 작가들의 창의적인 상상이 그들을 촘촘히 엮어 이야기를 만들고 장면을 만들어 내는 것이니, 문화 콘텐츠를 놓고 역사 왜곡이란 프레임을 씌워 비판하는 것은 사실 범주의 오류에 불과하다.

물론 역사학자들과 한글 연구자들이 자신들이 입증해낸 역사적 사실들과의 거리를 강조하기 위해서 이런 언어를 사용할 수는 있다. 하지만 많은 인터뷰에서 공히 찾아낼 수 있듯이 ‘영화적 허구를 그대로 수용했을 경우’ 생겨날 수 있는 부작용에 대한 우려일 뿐, 제대로 된 역사 교육과 미디어 교육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고작 영화 한 편이 역사를 왜곡할 수 있다고 몰아가는 것은 과한 우려에 근거한 조리돌림에 불과하다.

일각에서는 감독이 ‘신미 대사 창제설’을 믿고 있어서 다른 콘텐츠들과 달리 강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는데, 설사 그렇다 해도 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가설이 영화 한 편으로 정설로 둔갑할 수는 없다. 우리 사회가 구축해 놓은 학술적 검증 시스템이 그리 만만하지 않거니와 세종대왕이 만드신 한글 덕분에 문맹률이 0에 가까운 한국의 집단지성이 그런 가설들에 현실적인 권위를 주지도 않는다. 사실 이번 논란도 집단지성의 힘이 작동하는 하나의 사례이기도 하다.

어떤 면에선 도발적인 문제 제기가 활발한 토론을 일으켜 학술적인 진보를 가져오기도 한다. 새롭게 입증된 사실들을 널리 퍼뜨리는 계기가 돼 기존 가설들을 수정하게 만들고, 또 기존 가설의 권위를 더해주기도 한다.

지금 ‘나랏말싸미’를 통해 촉발된 ‘세종대왕 한글 친제’설에 대한 검증은 역사학자들과 한글 연구자들의 적극적인 대응으로 오히려 더욱 권위를 갖게 됐다. 이런 과정이 담론을 통한 검증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모든 권위가 의심받게 되는 포스트모던 사회에서는 오히려 학계가 권위를 내려놓고 문화 콘텐츠를 통해 다양한 담론의 형성을 촉발함으로써, 역으로 학계의 권위를 인정받는 형태를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 ‘나랏말싸미’에 대한 수용자들의 격렬한 반응은 어찌 보면 우리 공동체의 ‘문화적 자산 부재’ 현상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오랜 일제 치하에서 문화를 말살당하고, 뒤이어 이어진 기나긴 독재 치하에서 진정한 우리의 문화적 자산 대신 독재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상징과 스토리를 주입당하면서 살아온 터라, 공동체의 모든 일원이 함께 동의하고 자부심을 느낄 문화적 자산들이 많지 않다. 또 그런 자산들을 충분히 연구하고 정리한 자료들도 부족하다. 근현대사는 아직도 민감한 이념적 반응을 끌고 다니고, 고대사는 제대로 연구조차 되지 않았다. 그러니 검증된 문화적 자산은 적고, 이들을 활용한 2차적 콘텐츠들도 다양하지 않으며, 그만큼 담론들도 풍성하지 않다. 즉, 아직도 탐구하고 입증해야 할 것들이 산적해 있기 때문에 온전히 그 문화적 자산을 누리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큰 자산 중 하나인 한글을 마치 산스크리트어의 한 아류(亞流)인 것처럼 오해될 수 있게 표현한 내용은 심각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것은 나의 정체성을 제대로 표현하게 하는 중요한 자산 하나를 훼손하는 것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 반발감은 어쩌면 독재와 권위에 의해 훼손됐던 정체성을 형성해 가는 과정일 수도 있다.

온갖 논란에도 분명한 것은 이 영화가 실제로는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과 동일한 메시지를 펼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나라의 근간은 국민이며, 리더들은 국민을 최우선으로 섬겨야 하고, 국민이 만들어 내고 향유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나라의 자산이라는 사실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 영화는 후에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김성수 시사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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