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세계 전사적지를 찾아서

한반도와 닮은…수많은 전쟁의 소용돌이

입력 2019. 07. 23   16:55
업데이트 2019. 07. 23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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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불가리아


소피아 군사박물관 야외에 전시된 소련제 방공미사일.사진=필자 제공
소피아 군사박물관 야외에 전시된 소련제 방공미사일.사진=필자 제공


불가리아는 요구르트와 과일·채소 위주의 식생활 덕분에 ‘장수마을’이 많은 곳으로 우리에게는 막연하게 인식되는 국가다. 이 나라는 한때 대(大)불가리아제국을 부르짖으며 발칸 지역의 5분의 3을 점령했지만, 강대국 압력으로 많은 영토를 타민족에게 넘겼다. 특히 복잡한 이 지역의 이익충돌로 벌어진 1912~1913년의 제1·2차 발칸전쟁은 결국 세계전쟁을 잉태했다. 불가리아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편에 가담해 패전국이 됐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처음에는 추축국 편에 섰다가 1944년 소련 쪽으로 돌아서면서 승전국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공산위성국가로 45년 암흑기를 보낸 후 겨우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변신했다. 오늘날 불가리아는 인구 700만 명, 국토면적 11만㎢, 연 국민 개인소득은 7200달러 수준이다. 군사력은 현역 3만1300명(육군 1만6300, 해군 3450, 공군 6700, 참모부 4850명), 준 군사부대 1만6000명, 예비군 3000명이며 2004년 북대서양조약기구에 가입했다.

제1·2차 발칸전쟁 사라진 제국의 꿈


강대국 사이에 낀 불가리아 역사는 한반도의 과거와 비슷하다. 1800년대 발칸반도는 오스트리아와 오스만튀르크라는 두 제국이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는 지중해 진출을 위해, 영국·프랑스는 아시아 석권을 위해 발칸 지역을 통과해야만 했다. 따라서 강대국들은 먼저 발칸 여러 민족을 독립시킨 후 자신들의 입맛대로 요리하고자 했다. 흡사 1894년 청일전쟁 후 일본이 종전문서 제1조에 “조선은 자주독립국이다”라고 명시한 후 한반도를 자신의 세력권에 편입시킨 수순과 똑같다.

결국 1877년 터키-러시아가 격돌했고, 패전국 터키는 러시아에 발칸영토 양보와 지중해 진출권을 허용했다. 하지만 영국·오스트리아는 국제조약을 통해 러시아 세력의 확산을 막았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 수백 년 터키 지배를 받아오던 이 지역 국가들이 1912년 발칸동맹(불가리아·세르비아·그리스·몬테네그로)을 결성, 터키를 공격해 승리했다(제1차 발칸전쟁). 하지만 승전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인 1913년 불가리아가 터키군이 철수한 마케도니아를 차지하려고 다시 전쟁을 일으켰다. 이에 세르비아·그리스와 과거 적국이었던 터키 그리고 인접 루마니아까지 불가리아에 맞섰다(제2차 발칸전쟁). 불가리아는 두 달 만에 항복했고 대제국 건설의 꿈은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이처럼 아수라장 같은 발칸반도의 민족·종교·영토 갈등이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마침내 1914년 7월 28일 제1차 세계대전으로 폭발하고 말았다.

소피아 중앙공원 내 소련군 입성 환영조각상 하단부에 낙서가 어지럽게 적혀 있다. 조각상 뒤편에 승전기념탑도 보인다.
소피아 중앙공원 내 소련군 입성 환영조각상 하단부에 낙서가 어지럽게 적혀 있다. 조각상 뒤편에 승전기념탑도 보인다.

소피아 군사박물관서 본 불가리아 전쟁사
불가리아 소피아 군사박물관은 여행객들에게 꼭 가봐야 할 관광명소로 널리 알려져 있다. 1916년 유럽에서 가장 큰 시설로 건립된 이 박물관은 100만 점의 군사 유물과 불가리아·유럽전쟁사 자료를 풍부하게 갖추고 있다.

웅장한 실내 유물관과 넓은 야외 전시장의 무기·장비는 19·20세기 유럽 전쟁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불가리아는 지정학적으로 다양한 국가와 국경을 접했다. 동쪽에 터키, 서쪽에 세르비아·북마케도니아, 남쪽에 그리스, 북쪽에 루마니아, 흑해 건너편에 러시아가 있다. 이 중 북마케도니아를 빼고 인접 국가와는 발칸전쟁과 제1·2차 세계대전에서 적어도 한 번 이상은 피 튀기는 전쟁을 치렀다. 국제사회에서 이웃 나라와 사이좋은 관계가 거의 없듯이 불가리아는 태생적으로 빈번한 전쟁에 휩쓸릴 수밖에 없었다.

3층으로 이뤄진 전시관에는 오스만튀르크 지배를 벗어난 1800년대 후반의 불가리아군 제복·메달 및 전쟁 발발·경과 자료가 있다. 제1차 발칸전쟁 당시 불가리아 인구는 500만 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단 2주 만에 40만 명의 병력을 동원해 터키군을 격파하기도 했다. 야외 전시장 발칸전쟁 요도(要圖)는 이런 승전사와 당시의 전투상황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대불가리아 제국 건설의 꿈은 2차 발칸전쟁과 1차 대전 패배로 사라졌다. 불가리아 영토는 대폭 줄었고 강대국 눈칫밥을 먹는 약소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신의 없는 동맹국 파탄과 소련군 승전기념탑
1940년대 인구 650만 명의 불가리아는 약 15만 명의 군사력을 보유했지만, 무기·장비는 1차 대전 당시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히틀러는 헝가리·루마니아·불가리아 등 동유럽과 발칸 국가들을 소련과의 전쟁 시 총알받이로 쓸 생각이었다. 독일군은 이들에게 자국의 최신 무기 대신 주로 점령국 노획 무기를 제공해 생색내기에만 급급했다. 따라서 부품 확보나 정비에 많은 문제점이 생겼고, 진정한 의미의 동맹국 신의를 쌓지 못했다. 결국 2차 대전 말기 이 국가들은 소련군의 반격으로 전세가 기울자 당장 총부리를 어제의 친구에게 거침없이 들이댔다.

소피아 시내 중심가에는 나치 치하 불가리아를 해방한 소련군 승전기념탑·조형물들이 곳곳에 있다. 하지만 공산 위성국가 당시의 악감정은 불가리아인들에게 아직도 남아있는 듯했다. 시내 중앙공원의 소련군 환영조형물 하단에는 검은 페인트로 어지럽게 적힌 욕설 낙서가 방치돼 있었다.


한류 열풍이 심어준 외국인들의 한국사랑
소피아 중앙역에서 루마니아행 기차가 출발하는 8번 플랫폼을 찾았다. 그러나 그곳에 열차는 없었고 출발시각이 가까워져 오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마침 대형 배낭을 멘 2명의 프랑스 청년을 만나 열차표를 보여줬다. 유심히 표를 살피던 청년들은 숫자 ‘8’ 끄트머리에 붙어있는 미세한 꼬리 표시를 가리켰다. 불가리아어로 ‘서쪽(West)’이라는 의미란다. 똑같은 선로이지만, 서쪽으로 한참 떨어진 곳에 달랑 세 칸짜리 루마니아행 기차가 정차해 있었다.

배낭 여행객 조르단과 피에르는 파리의 대형 카지노 바텐더로 일했다. 그들은 매월 받는 급여가 어느 정도 비축되면 항상 수개월씩 해외여행을 떠나곤 한단다. 미래를 위한 장기저축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특히 다음 여행지인 한국 서울의 물가와 봉급생활자 급여 수준에 관심이 많았다. 여행 경비가 다소 부담되지만, 세계를 휩쓸고 있는 한류 열풍의 발상지를 반드시 가보고 싶다고 했다.

<신종태 통일안보전략硏??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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