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세계 전사적지를 찾아서

파르티잔과 티토 그리고 인종청소

입력 2019. 07. 16   16:48
업데이트 2019. 07. 16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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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세르비아


베오그라드 성곽 내 세르비아 군사박물관의 야외전시장 전경.
베오그라드 성곽 내 세르비아 군사박물관의 야외전시장 전경.

‘유럽의 화약고’로 불렸던 발칸반도 유고연방은 복잡한 민족·종교로 구성돼 있었다. 즉 2개의 문자, 3개의 종교, 4개의 언어, 5개의 민족, 6개의 공화국을 가진 짜깁기 나라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부터 1980년까지 티토가 이끈 유고연방은 비교적 안정된 정치체제를 유지했다. 하지만 1989년 공산권 체제가 와해하자 각 공화국이 독립을 선언하면서 내전이 벌어졌다. 이 갈등은 ‘백인의 치욕’이라고 개탄하는 ‘인종청소’라는 끔찍한 살육전까지 가져왔다. 유고연방의 세르비아는 두 차례의 내전·전쟁으로 경제적 기반이 황폐해지면서 빈국으로 전락했다. 현재 세르비아는 국토면적 8만8000㎢, 인구 700만 명, 1인당 국민 연소득은 5580달러 수준이다. 군사력은 현역 2만6550명(육군 1만3250명, 공군 5100명, 훈련센터 및 국경수비대 8200명), 예비군 5만150명을 보유하고 있다.


국제열차서 만난아프간 난민 청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행 국제열차는 서유럽 고속열차에 비하면 서비스·시설 면에서 한참 뒤떨어져 있다. 부다페스트를 출발한 지 2시간쯤 지나 도착한 헝가리 국경역. 꼼꼼한 출국검사 후 기차가 국경을 넘어 세르비아로 들어서자 주변은 높은 산과 깊은 계곡의 연속이다. 세르비아의 국경역 입국심사는 허리춤에 권총·수갑·방망이를 찬 무장경찰이 나타나 아예 여권을 회수해 간다. 거의 1시간 정차한 후, 기차는 다시 출발했다. 서유럽 국가들과는 판이한 입국 절차다.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식당칸을 찾아갔다. 구석진 자리에 혼자 앉아있는 청년과 커피를 나누며 인사하니 아프간 난민 알리라고 한다. 그는 카불 치과대학을 다니다가 내전을 피해 조국을 떠났다. 현재 약 600만 명의 아프간 난민이 세계 각지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단다. 치과의사의 꿈은 이미 물거품이 됐고 어느 나라가 자신을 받아줄 것인지도 막막하다고 한다. 타국에서 눈칫밥을 먹으며 전전긍긍하는 아프간 청년의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티토가 이끈 ‘파르티잔’ 게릴라대원들의 모습.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티토가 이끈 ‘파르티잔’ 게릴라대원들의 모습.

세르비아 군사박물관 유고 게릴라전쟁사 
 
베오그라드 성곽 내의 세르비아 군사박물관에는 수백 년 동안의 전쟁 역사가 진열돼 있다. 특히 1929년 건국된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2차 대전 시 대독(對獨) 투쟁 자료들이 많았다.
1941년 4월 6일 새벽, 수도 베오그라드 시민들이 단잠에 빠져 있는 시간 수백 대의 독일 폭격기가 머리 위로 폭탄을 쏟아부었다. 사흘 동안 계속된 무차별 폭격으로 1만70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유고 국왕과 시민들의 독일 저항에 대한 대가였다. 4월 17일, 나치 군대가 폐허가 된 베오그라드에 들이닥치자 유고에는 2개의 거대한 자생적 게릴라조직이 탄생했다. 첫째는 미하일로비치 장군이 이끄는 기존 유고 왕정을 지지하는 ‘체트니크’라는 약 15만 명의 게릴라조직이었다. 둘째는 공산주의자 티토가 이끈 ‘파르티잔’이었다. 그의 투쟁목표는 나치 격멸과 조국을 ‘노동자 천국’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티토는 일찍부터 미하일로비치가 친연합국 성향의 반공주의자라고 판단했다. 두 게릴라 활동에 원한이 사무친 나치는 시민들을 무자비한 보복 대상으로 삼았다. 나치의 유고 점령 4년 동안 무려 50만 명이 살해됐다. 1945년 5월, 전쟁이 끝나자마자 티토는 대독 투쟁의 영웅 미하일로비치를 체포해 나치 협력의 죄명을 뒤집어씌워 1946년 7월 17일 처형했다.

1941년 4월 독일 공군이 베오그라드폭격 당시 사용한 대형 폭탄. 세르비아 군사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1941년 4월 독일 공군이 베오그라드폭격 당시 사용한 대형 폭탄. 세르비아 군사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티토 무덤과 독재의 어두운 그림자 
 
2차 대전 후 발칸 공산국가 중 가장 먼저 티토가 이끄는 유고가 독자 노선을 고집했다. 그는 중립을 표방하면서 서방은 물론 공산권과도 동맹을 맺지 않는 비동맹정책을 유지했다. 이와 같은 ‘티토주의’는 국민으로부터 지지를 받아 유고를 비교적 평화롭고 안정된 상태로 유지할 수 있었다. 특히 티토는 조국을 해방한 전쟁영웅으로 민중들에게 각인돼 35년간의 독재체제에도 누구 하나 반기를 들 수 없었다.

1980년 5월 4일 사망한 티토는 베오그라드의 한적한 기념공원에 안장돼 있다. 부인과 나란히 묻힌 대리석 묘역 주변은 생전의 행사 사진 및 기념품들이 즐비하다. 특히 묘역 별관에는 세계 각국에서 보내온 선물 기념관이 별도로 있다. 전형적인 공산권 국가들의 지도자 신격화 선전물 전시장처럼 보였다.


인종청소 막은 NATO 공군 대공습 

 
티토 사망 이후 유고는 집단지도체제로 바뀌었다. 당시 첨예한 냉전으로 동·서방 관계가 꽁꽁 얼어붙은 현실에서 유고연방의 여러 민족은 독립을 주장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1989년 동유럽 공산주의가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면서 유고 민족분쟁은 처참한 살육전으로 변했다. 1991년 6월,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독립을 요구하자 세르비아군은 자국민 보호 명분으로 무력진압에 나섰다. 약 3년7개월간 내전으로 사망자 20만 명, 난민 200만 명이 발생했다. 1995년 12월, 미국 주도하에 관련국 평화협정으로 가까스로 내전은 종식됐다.

하지만 1996년 코소보 알바니아계 주민들의 독립투쟁이 또다시 일어났다. 이에 세르비아군은 ‘인종청소’로 불릴 정도로 잔인한 진압작전을 시작했다. 당시 영국 BBC는 코소보판 킬링필드의 생생한 영상을 공개했다. 결혼식 비디오 기사가 현장에서 목숨을 걸고 찍었던 자료였다. 머리 뒤 총탄을 맞고 불탄 숱한 시신, 옷이 벗겨져 숨진 여성 등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장면이 가득했다(1999년 4월 5일 조선일보). 1999년 3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공군은 드디어 대대적인 공습으로 대응했다. 78일 동안 총 3만5000여 회의 전폭기가 출격했고, 일일 452회 공습으로 세르비아는 초토화됐다. 결국 세르비아 정부는 서방국가들의 외교·군사적 압력에 코소보 독립을 승인했다. NATO군 피해는 2명의 사망자와 전체 운용 항공기의 0.01%에 해당하는 5대가 전부였다. 피해 확률 면에서 걸프전의 5분의 1, 베트남전의 130분의 1에 불과했다. 이에 비해 세르비아군은 1만여 명의 사상자와 6500여 명의 민간인 피해자가 생겼다. 최첨단 기술이 집약된 항공전력 위력이 ‘인종청소’의 비극을 멈추게 한 특이한 현대 전쟁 사례였다.

<신종태 통일안보전략硏 연구원>
사진=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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