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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군사명저] 일본 대전략 수립 땐 ‘승승장구’ 망각 땐 ‘자멸의 길’

입력 2019. 07. 12   17:16
업데이트 2019. 07. 14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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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인의 『일본제국: 메이지 유신부터 태평양전쟁까지의 일본의 대전략』


페인 S.C.M. Paine

『일본제국: 메이지 유신부터 태평양전쟁까지의 일본의 대전략』

The Japanese Empire: Grand Strategy from the Meiji Restoration to the Pacific War.

캠브릿지대학 출판부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7년


1945년 9월 2일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일본의 각료가 항복 문서에 서명하는 모습. 『일본제국: 메이지 유신부터 태평양전쟁까지의 일본의 대전략』의 저자 페인은 일본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이후 군사적 수단에만 집중하면서 대전략을 잃어버려 이후의 전쟁에서 패배하게 됐다고 분석하고 있다. 미 국방부 아카이브
1945년 9월 2일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일본의 각료가 항복 문서에 서명하는 모습. 『일본제국: 메이지 유신부터 태평양전쟁까지의 일본의 대전략』의 저자 페인은 일본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이후 군사적 수단에만 집중하면서 대전략을 잃어버려 이후의 전쟁에서 패배하게 됐다고 분석하고 있다. 미 국방부 아카이브


영국의 유명한 군사전략가 리델 하트는 ‘대전략’을 ‘전쟁에서 추구하는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국가의 모든 자산과 동맹국들의 능력을 상호 조정 및 지시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그는 대전략의 수단을 경제, 외교, 정보, 군사 등 국력의 제반 수단으로 확대해 생각했다. 또한 전시뿐만 아니라 평시로 그 적용 시점을 확대했다.

1868년의 메이지유신 이전까지만 해도 동북아 지역의 미약한 국가였던 일본은 어떻게 단기간에 일류 국가로 부상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했고,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서는 많은 난관에 직면하게 됐는가? 저자는 그 이유를 대전략 차원에서 설명하고 있다. 메이지유신 세대들이 국력의 제반 수단을 평시 육성하고 전시 적절히 배합하는 등 올바른 대전략을 구사했던 반면, 러일전쟁 이후 세대들은 군사적 수단에만 전념한 결과 일대 재앙을 맞았다는 분석이다.


메이지유신과 일본의 대전략

두 차례에 걸친 아편전쟁(1839~1842·1856~1860)에서 중국의 처참한 패배를 목격한 일본의 지도자들은 다음 차례가 일본일 것으로 생각했다. 이들은 서구 국가들이 제기하는 위협의 본질에 관해 더 많이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에 1857년 에도 막부는 서구 서적들을 연구하기 위한 조직을 만들었다. 1868년에는 메이지유신을 추진해 구시대의 악습을 타파하는 등 많은 개혁을 추구했다.

당시 추진된 개혁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은 서구의 민간 및 군의 제도를 완벽히 연구하기 위해 고위급 민간 및 군 관리들을 외국에 파견한 것이었다.

메이지 개혁가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은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였다. 그는 고위급 정치가와 학생을 포함한 50명의 사절단을 2년 동안 미국 등 12개 국가에 파견했다.

사절단에는 메이지헌법을 만든 이토 히로부미가 포함돼 있었다.

이와쿠라 사절단은 서구의 군사·정치·경제·법·사회·교육 제도 등을 연구했고, 그 힘의 원천이 단순한 과학기술 또는 군사무기가 아닌 ‘제도’라는 결론을 내렸다.

첨단 과학기술, 특히 군사 기술과 무기 획득을 의미하는 근대화가 아니고, 민간과 군 모두에서 서구 제도의 도입을 의미하는 서구화가 국가 안보의 근간이란 것이었다.

이들은 서구 제도를 도입할 경우 일본인들의 기존 생활 방식이 심각히 위협받을 수 있음을 인지했다. 그러나 일본은 서구화가 아닌 근대화를 통해 서구 위협에 대항하고자 했던 중국의 처참한 결과를 보면서 내부적으로 많은 반발에도 불구하고 서구화를 택했다.

일본은 서구 사회의 실상을 파악한 후 추구해야 할 목표와 이 같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대전략을 구상했다. 메이지세대가 추구한 주요 목표는 서구 및 러시아 제국주의에 맞서 일본의 안보와 독립을 보존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2단계의 순차적인 대전략을 구상했다. 먼저 일본 내부의 제도를 정립한 후 외국과의 전쟁을 통해 제국을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같은 맥락에서 민간 부분의 경우 막부제도 폐지(1869), 의무 초등교육(1872), 재정 및 법적인 제도 구비(1882), 수상과 내각 중심의 정치제도 구비(1885), 동경제국대학 설립(1887), 헌법선포(1889), 의회 및 사법 제도 정립(1890) 등을 추구했다. 군은 징병제(1873)와 일반참모제(1878) 도입, 참모대학 설립(1883) 등이 추진됐다.

일본은 이러한 제도 정립 이후 전쟁을 통한 제국 건설에 착수했다. 청일전쟁(1894~1895), 러일전쟁(1904~1905), 중일전쟁(1937~1945), 태평양전쟁(1941~1945)이 바로 그것이었다.


청일전쟁, 러일전쟁,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 국력은 일본의 7배에 달했고, 국민소득은 2배 수준이었다고 한다. 중국 또한 마찬가지로 알려졌다. 그러나 승리한 것은 일본이었다.

저자는 일본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를 ‘중국·러시아의 실책과 더불어 일본이 제대로 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일본이 전쟁목표를 분명히 설정하고 이 같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경제, 외교, 군사 등 국력의 제반 수단을 통합적으로 운용할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저자는 러일전쟁 당시 일본이 영일동맹을 이용해 소련을 외교적으로 고립시켰으며, 극동지역으로 오고 있던 러시아 함대에 많은 제약을 가했다고 분석한다. 또한 전비 마련 차원에서 국내외 차관을 이용했고, 정보 수집 차원에서 중국인 이발사 등을 첩자로 운용했으며, 러시아 내부의 계급갈등과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심리작전을 펼쳤다고 설명한다. 아울러 미 루스벨트 대통령으로 하여금 전쟁을 중재하도록 하버드대학 일본인 동문들을 활용했다고 한다.

반면 러시아인들은 로마노프 왕조에 대한 불만이 없지 않았고, 이것이 러시아에 불리하게 작용했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저자에 따르면, 러시아는 만주지역으로 철로가 연결돼 있지 않아 극동지역 전장에 적시에 충분한 병력을 동원하기 쉽지 않았으며, 군사적 전문성이 아니고 정실에 입각한 인사로 극동지역 러시아군의 지휘권이 양분되는 등 지휘구조 측면에서 많은 문제를 야기했다. 또한 청일전쟁과 동일한 지역에서 지상전이 벌어질 가능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청일전쟁 시기 일본군의 전략과 전술은 물론이고 전장 지형을 제대로 연구하지 않았다.

저자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당시 일본은 자국이 거둔 군사적 성과와 비교해 러시아와 중국으로부터 받은 배상금이 작았다고 말한다. 이에 일본인 대부분은 장군들이 이긴 전쟁을 민간인들이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일본 내부에서 군인의 위상은 상대적으로 높아졌다. 일본은 점차 전승을 정치적 목표 달성이 아니고 군사적 관점에서 평가하게 됐다. 국력의 주요 수단 가운데 군사적 수단에 집중하면서 일본에서 대전략이 실종됐다는 것이다.

저자는 왕조 국가에 대항해 싸웠던 청일·러일전쟁과 달리 중일전쟁 당시 일본은 민족주의로 뭉친 중국인들과 싸웠고, 태평양전쟁에서는 민주주의 이념으로 무장한 미국에 대항해 싸우게 됐다고 말한다. 특히 지구상 제일의 경제력을 갖춘 미국과 싸우게 된 것과 광활한 중국 대륙에서 지상전을 추구한 것은 일본의 커다란 실책이라는 관점을 보여준다.

저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중국과 태평양이란 2개 전선에서 싸우고자 했고, 해양국가인 일본이 중국이란 거대한 대륙에 보다 많은 비중을 뒀으며, 국력의 제반 수단 가운데 군사적 수단에 주로 의존해 전쟁을 수행하고자 했기에 패배했다고 말하고 있다.


올바른 제도와 절차의 중요성

1990년대 말 이후 우리 군은 군사혁신을 추구했다. 외국 학자들은 한국군이 2000년대 중반까지 군사혁신을 이룰 것으로 생각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음을 발견했다. 이들은 한국군의 군사혁신이 교리 및 전략과 같은 제도 및 절차의 혁신이 아닌, 항공기·전차·함정 등 하드웨어 구입 성격으로 진행됐기 때문이란 결론을 내렸다.

이 같은 측면에서 국가 안보의 근간이 올바른 제도와 절차 정립임을 강조하고 있는 이 책은 우리 군에 암시하는 부분이 적지 않아 보인다. 특히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측면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미흡한 부분이 경제·군사 등 국력의 제반 수단을 평시 육성하고 전시 통합하기 위한 방법, 즉 대전략이란 점에서 보면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권영근 
한국국방개혁연구소장
권영근 한국국방개혁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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