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보훈의 달에 만난 사람 ③ (사)의병정신선양중앙회 이태룡 의병연구소장
30여 년간 잊혔던 의병 1300여 명 발굴 서훈 신청
국가기록원·통감부 문서 등서 자료 찾아 공적 증명
“잘못된 역사 바로잡았을 때 가장 큰 보람 느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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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조국이 신음할 때 일제의 무자비한 총칼에 맞서 분연히 일어선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의병’입니다. 박은식 선생은 ‘의병이란 국가가 위급할 때 즉각 의(義)로써 일어나 조정의 징발령을 기다리지 않고 종군해 분연히 대적하는 자’라고 정의 내렸습니다. 조국을 위해 스스로 일어난 민병이라고 할 수 있죠. 이들의 의병 정신은 오늘날 우리가 반드시 이어가야 할 유효한 가치입니다.”
사단법인 의병정신선양중앙회 의병연구소장이자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에서 독립유공자 발굴팀을 이끌고 있는 이태룡(64) 박사는 26일 인천대 미추홀캠퍼스에서 진행된 국방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이 박사는 30년 넘게 의병 연구에 몰두해 온 의병 전문가로 지금까지 이름 없이 잊혔던 의병 1300여 명을 발굴해 서훈을 신청했다. 그는 “의병은 겨레의 안위를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나선 의인(義人)이었다”며 “투철한 애국심을 바탕으로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쳤던 의병들의 숭고한 정신을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우리 군 장병들이 알아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 인천대학교 독립유공자발굴팀은 지난 1일 의병의 날을 맞아 215명의 독립유공자를 발굴해 포상신청서를 제출했다. 독립유공 포상은 당연히 이뤄져야 하는 일이지만 신청 과정이 무척 까다로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까지 의병 연구를 하면서 의병 1300여 명과 3·1만세 의거 유공자 400여 명 등 총 1700여 명을 발굴해 포상 신청했다. 신청자에게만 서훈하기 때문에 같은 재판을 받았지만 어떤 분은 훈장을 받고 어떤 분은 받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조국을 위해 희생한 분을 발굴해 기리는 작업은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하는 중요한 일이다. 포상 신청을 하려면 양식에 따라 증거자료를 첨부해야 하는데 국가기록원, 국가보훈처 전사사료관, 규장각, 국사편찬위원회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통감부·총독부 문서, 주한일본공사관기록 자료를 찾아 공적을 증명해야 한다. 꽤 복잡하고 어려워서 일반인이 접근하기 쉽지 않다.”
- 이번 서훈 신청 명단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인물이 있다면?
“의병투쟁 유공자 187명과 의열투쟁 유공자 28명을 서훈 신청했다. 3명을 제외한 모두는 재판 기록이 있다. 눈에 띄는 인물은 1907년 가을부터 겨울까지 전국 의병이 연합해 서울진공작전을 전개했을 당시 13도 창의대진소 관서창의대장으로 활동한 의병장 방인관(方寅寬)과 진주의병장 정한용(鄭漢鎔) 등이다. 안중근 의사의 사촌 동생 안명근 의사도 포함돼 있다. 이들은 국사 교과서에 나올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지만 아직 포상되지 않았다.”
- 독립운동사에서도 의병 연구는 주류가 아닌 것으로 알고 있다. 생소한 분야인 ‘의병 연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일제의 주장이 담긴 우리 근대 문학사를 바로잡기 위해 의병들의 삶을 다룬 ‘의병 문학’을 전공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나자 ‘나라의 원수를 갚자’, ‘국모의 원수를 갚자’라는 ‘국수보복(國讐報復)’의 기치를 내걸고 일어났던 전기의병, 을사늑약에 따라 대한의 황제 아래에 일본인 통감을 두게 되자 ‘국권회복(國權恢復)’을 위해 떨쳐 일어섰던 삶 등이 우리 겨레의 정신을 대변한다. 근대 문학의 중심은 일제의 주장이 아닌 의병을 일으킬 때 필요했던 통문(通文)·격문(檄文)을 비롯해 의병의 노래인 의병가사, 의병·의병장에 대한 제문(祭文) 등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의병문학과 의병의 삶을 주제로 총 37권의 단행본을 출간했다.”
- 지난 30여 년 동안의 의병 연구 중 대표적인 성과가 있다면.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았을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 1995년 ‘한말 의병 100주년 기념학술회의’에서 면암 최익현 선생은 ‘대마도에서 유배됐다가 굶어서 순국한 것이 아니라 대마도에 구금됐다가 125일 만에 병사했다’고 발표했고 이에 따라 국사 교과서 내용이 바뀌게 됐다. 2009년에는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의 실상을 KBS와 함께 규명했다. 지난해에는 백범기념관에서 열린 ‘운강 이강년 의병장 순국 110주년 기념 학술회의’에서 1907년 가을부터 겨울까지 이인영 의병장이 13도 창의대진소를 설치해 서울진공작전을 벌였을 때 의병대와 직할대 300명을 이끌고 동대문 밖 30리까지 진격한 주인공은 왕산 허위가 아니라 이인영 총대장이었다는 내용을 밝혔다.”
- 지금 이 순간 조국을 지키고 있는 군 장병들에게 소개해 주고 싶은 의병이 있다면.
“모든 의병의 겨레를 위하는 마음은 똑같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가족을 남겨두고 전장으로 나갔던 의병들은 자신의 목숨보다 조국을 생각했던 의인이었다. 수많은 재산을 내놓고 의병을 모집한 민종식, 일제에 맞서 끈질긴 투쟁을 벌인 신돌석 의병장, 일본 관헌이 주는 밥은커녕 물도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순국한 노응규 의병장, 일본인 재판관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모양으로 비치지 않기 위해 1심 재판 후 공소를 포기하고 순국한 강무경·강사문·심남일·안계홍·안중근·이강년·이은찬·이인영, 광무황제로부터 의병을 일으키라는 밀지를 받고 거의(擧義)한 뒤 모든 재판에서 일제의 만행을 꾸짖은 전해산 의병장, 남편의 상여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와 극약을 마시고 숨지자 상여가 되돌아와서 쌍상여로 장례를 치렀던 전해산 의병장 부인. 이들의 삶은 슬프다기보다 장엄한 것이었다. 군 장병들이 이들을 되새기며 어려웠던 시대 상황을 기억해주길 바란다.”
- 오늘날 장병들이 의병 정신을 꼭 알아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국민의 4대 의무 중 국방의 의무는 가장 신성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쟁터에 나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다는 것만큼 신성한 의무는 없다. 의병은 ‘나라가 외침으로 인해 위태로워졌을 때 나라의 부름을 받지 않고 일어선 민병’으로 우리나라와 겨레를 지켜온 전통정신이다. 애국심, 국가관, 희생정신, 민족정신이 모두 결집된 숭고한 의병 정신을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고 있는 장병들이 알아주길 바란다.” 글·사진=안승회 기자 lgiant61@dema.mil.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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