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용어로 다시 읽는 미술사

식물서 모티브…곡선 사용해 물결양식이라 불려

입력 2019. 06. 26   16:11
업데이트 2019. 06. 26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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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삶을 위한 예술, 아르누보-장식미술, 모조, 900년 양식, 기마르 양식, 유겐트스틸, 제세션, 아르테 호벤, 스틸레 리바티, 모던 스타일, 아르데코


英서 출발…예술, 삶의 일부라 생각
윤택한 삶의 가치 추구한 예술운동
공예·장식미술 등 생활과 밀접
유럽 대륙·미국·남미·일본에 영향
지나치게 장식적…대중화에 한계
전성기 10년 지나 아르데코로 대체



예술을 일컬어 새롭지 않은 것이 없다 하겠지만 특정한 미술사조를 두고 ‘새로운 예술’이란 명칭을 붙인 경우는 아르누보(Art Nouveau)가 유일하다. 1890년부터 1910년까지 유럽은 물론 미국과 남미 그리고 일본 등 동양까지 영향을 미쳤다. 현재진행형이라고 할 수 있는 아르누보는 우리가 지금까지 다뤘던 회화나 조각, 건축과 달리 공예 또는 장식미술 등 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된 미술이다. 

 
새로운 미술사조의 출발지가 대개 프랑스였던 것과 달리 아르누보 운동의 진원지는 영국이다. 유럽 변방의 섬나라 영국이 ‘태양이 지지 않는 나라’로 부상하면서 영국 부르주아의 삶은 윤택해졌다. 하지만 삶의 많은 도구들이 대량생산체제 속에서 생산되면서 가구 등이 매우 조악하고 무미건조한 형태로 퇴보했다. 이런 가운데 아르누보 운동은 예술이란 높고 이상적인 것이 아니라 삶의 일부라야 한다고 생각하며 진정으로 윤택한 삶의 가치를 실현하고자 했다.


공예품 대량 생산에 거부감 ‘미술공예운동’

이런 움직임의 중심에는 처음으로 ‘장식미술’을 강의한 영국의 월리엄 모리스(1834~1896)가 있다. 노동의 가치를 중시한 그는 공예품이 기계로 대량 생산되면서 손의 가치를 잃어버리는 것에 강한 거부감을 가지며 당시를 풍미하던 과장된 로코코 스타일의 복고풍 모조 양식을 거부했다. 그의 제자들도 자연스럽게 이런 운동에 참여했는데 이것이 미술공예운동이다. 이즈음 스코틀랜드 출신인 찰스 레니 매킨토시(1868~1928)는 후에 그의 아내가 되는 마거릿 맥도널드(1864~1933)와 처제가 될 프랜시스 맥도널드(1873~1921), 제임스 허버트 맥네어(1868~1955)와 함께 ‘4인 그룹’을 결성해 아르누보운동을 전개한다. 초기 아르누보풍의 전형으로 모리스의 ‘붉은 집’이 있다. 또 영국에서 활동하며 ‘예술을 위한 예술’을 표방했던 미국화가 휘슬러(1834~1903)의 ‘호화로운 공작방’도 대표적인 영국 아르누보 양식이다. 이 운동은 라파엘 전파의 화가들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하는데 판화가 셀윈 이미지(1849~1930), 삽화가 헤이 우드 섬너(1853~ 1940), 월터 크레인(1845~1915), 조각가이면서 금속공예가였던 앨프리드 길버트(1854~1934) 등이 아르누보를 대표한다.

아르누보는 미술의 범주를 회화뿐만 아니라 건축, 그래픽 아트, 인테리어 디자인, 보석, 가구, 섬유, 조명과 가정용 도구 즉 살림살이 등 장식예술을 포함하는 모든 예술로 그 영역을 확대했다. 이들에게 예술은 삶의 방식이었다. 산업혁명 이후 부유해진 중산층은 아르누보풍 가구, 식기, 직물, 장신구, 도자기를 사용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중산층의 삶이라고 생각했다. 아르누보풍은 1910년경 모더니즘이 건축과 장식미술 스타일을 대체할 때까지 영향력을 행사했다. 오늘날 명품으로 불리는 여러 브랜드들도 이때 시작된 것이다.


도버해협 건너 벨기에로 전파

아르누보운동은 도버해협을 건너 벨기에로 전파되면서 전 유럽으로 급속히 퍼져나갔다. 벨기에는 1830년 혁명 이후 세워진 작은 나라지만 19세기 중반부터 영국 다음으로 중요한 산업국가였다. 벨기에 아르누보의 중심에는 건축가 앙리 반 데 벨데(1863~1957)와 기능주의를 주창한 빅토르 오르타(1861~1947) 그리고 폴 앙카르(1859~1901) 등이 있다. 현재 브뤼셀의 익셀지구 루이스가에 가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빅토르 오르타의 저택과 아틀리에, 타셀 저택, 솔베이 저택, 반 에드벨데 저택 등을 만날 수 있다.


식물 문양 파리 지하철역 입구 장식


아르누보라는 말은 독일의 미술품과 공예품 등을 판매하던 사무엘 빙(1838~1905)이 1895년 파리에 ‘메종 드 아르누보’를 열면서 일반화됐다. 갤러리 빙은 벨기에의 반 데 벨데(1863~1957)가 장식을 맡았고, 1900년 만국 박람회에 현대적인 가구, 태피스트리, 공예품 등을 출품해 엄청난 호응과 명성을 얻었다. 이후 아르누보는 빙이 제공한 새로운 스타일을 규정하는 용어가 됐다.

프랑스는 아르누보를 발전시켜 ‘900년 양식’이라고 칭하면서 최전성기를 이뤘고, 프랑스 아르누보를 이끈 건축가 엑토르 기마르(1867~1942)의 이름을 따 ‘기마르 양식’이라고도 부른다. 기마르는 식물 문양의 파리 지하철역 입구 장식을 만들었다. 또 체코 출신으로 후에 일본과 한국 순정만화의 전형을 제공한 알폰스 무샤(1860~1939)와 보석장식가 르네 줄 랄리크(1860~1945)가 있다. 또 유리, 금속, 도자에 능했던 공예가 에밀 갈레(1846~1904), 유리공예가 다움(1825~1885), 가구의 루이스 마조렐(1859~1926), 목공예의 유진 발랭(1856~1922)과 자크 그루베(1870~1936) 등 유명 공예가들이 보불전쟁 후 회복된 낭시에 자리 잡고 낭시학파를 결성하면서 아르누보를 상징하는 도시가 됐다.


독일잡지 유겐트, 아르누보 스타일 전파

좀 늦게 독일에 상륙한 아르누보는 1902년 에센 지방에 개관한 앙리 반 데 벨데의 폴크방크 미술관에 자극받았다. 이후 뮌헨의 ‘유겐트(Jugend)’라는 잡지가 아르누보 스타일을 전파해 여기서 ‘유겐트스틸(Jugendstil)’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독일공작연맹의 선구가 된 페테르 베렌스(1868~1940)와 ‘유겐트’· ‘팬’을 디자인한 베른하르트 판콕(1872~1943), 상감기법과 유닛 가구를 선보인 파울 브루노(1874~1968), 타이포그래퍼 겸 디자이너로서 오늘날 아르누보 양식의 이론가로 알려진 오토 에크만(1865~1902) 등이 대표적이다.


빈 분리파 예술가들과 만나 동유럽으로

아르누보는 오스트리아 빈의 분리파 예술가들과 만나 헝가리·체코로 번져나갔다. 빈의 아르누보는 ‘제세션(Secession)’이란 이름을 얻었다. 이곳의 아르누보는 클림트(1862~1918)와 아르데코 양식의 모던 가구를 만든 요제프 호프만(1870~1956), 격자 무늬의 비너 베르크슈테테 스타일을 만든 콜로만 모저(1868~1918), 요제프 올브리히(1867~1908) 등 19명의 젊은이들이 ‘오스트리아 미술가연합’을 결성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탈리아에서는 건축가 주세페 소마루가(1867~1917) 등이 활동한 ‘스틸레 리바티(Stile Liberty)’라는 이름으로,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한 스페인에서는 성 파밀리아 성당으로 유명한 건축가 가우디(1852~1926)가 중심을 이루는 ‘아르테 호벤(Arte Joven)’ 운동으로 진행됐다. 미국에서는 ‘모던 스타일’이란 이름으로, 건축가 루이스 설리번(1856~1924)과 루이스 컴포트 티파니(1848~1933) 등이 중심이 됐다. 특히 티파니의 공예품들이 유행하면서 미국 아르누보는 ‘티파니 스타일’로 불리기도 했다. 각기 이름은 달랐지만 내용은 같은 예술운동이었다.


직선과 동심원 이용한 아르데코가 대체


‘청춘’, ‘근대’, ‘자유’, ‘새로움’이라는 뜻을 지닌 아르누보는 주로 식물에서 모티프를 따와 곡선을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꽃의 양식’, ‘물결 양식’ 또는 ‘당초 양식’이라고도 한다. 또 새로운 것을 지향하지만 옛것에 기반해 ‘영혼의 자각 시대’라고도 한다. 그러나 아르누보가 추구하는 수준 높은 제품은 대중화가 어려웠다. 또 아름다움만 추구하다 보니 과도하게 장식적이어서 실용성이 떨어져 10년간의 전성기를 지나면서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대신 직선과 동심원 등을 이용한 단순하면서 기하학적인 면이 강조된 아르데코(Artdeco)가 이를 대체한다.


<정준모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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