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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항복 거부 결사 항전”에 트루먼 ‘고뇌의 결단’

입력 2019. 06. 25   15:34
업데이트 2019. 06. 25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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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끝> 1945년 8월 트루먼 대통령은 왜 원폭 투하를 결정했을까?


   
日본토 상륙전 땐 최소 100만 명 희생
인명피해 최소화.전쟁 조기 종결 위해
원폭 실험 성공 보고받고 투하 결정
히로시마·나가사키 초토화 日 항복
     

히로시마(오른쪽)와 나가사키의 원자폭탄 폭발 모습.
히로시마(오른쪽)와 나가사키의 원자폭탄 폭발 모습.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으로 태평양전쟁에 불이 붙었다. 삽시간에 태평양의 거의 절반과 동남아시아 전역이 일본군 수중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일본군의 위세는 불과 6개월 만에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1942년 6월 벌어진 미드웨이 해전에서 참패당해 태평양의 제해권을 빼앗기면서 차츰 수세로 몰렸기 때문이다. 이후 미군은 태평양 상의 중요 도서(島嶼)를 차례로 점령해 갔다.
미군이 점차 일본 본토로 접근하자 일본군은 장병의 목숨은 아랑곳없이 결사적으로 저항했다. 이대로 지상전을 지속하면 엄청난 인명손실이 불가피했다. 진퇴양난에 처한 미군 수중에 때마침 막 개발에 성공한 가공할 무기가 들어왔으니 다름 아닌 ‘원자폭탄’이었다. 고민 끝에 해리 트루먼(재임 1945~1953) 대통령은 일본에 대한 원폭 투하를 결정했다. 그렇다면 왜 트루먼은 최종적으로 원폭 투하를 결심했을까? 공포의 무기인 원폭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이것이 제2차 세계대전 전황과 이후 세계사에 미친 영향은 무엇일까? 이 글은 바로 이러한 의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는 한 시도다.



역사적 배경과 전개 과정

1939년 9월 1일 독일군의 폴란드 침공으로 2차 대전이 발발했다. 이로부터 약 4년10개월간 이어진 전쟁은 독일을 비롯한 추축국(Axis Powers)이 승세를 잡은 전반기(1939.9~1942.6)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Allied Powers)이 전세를 역전시키고 최종 승리한 후반기(1942.6~1945.8)로 나눌 수 있다. 전쟁은 두 진영의 인적·물적 자원이 망라된 총력전으로 전개됐다. 더구나 이전 전쟁과 달리 지구 전체가 전장화(戰場化)한 진정한 의미의 세계대전이었다. 1차 대전 이후 더욱 진전된 무기체계가 동원된 탓에 피해는 더욱 컸다. 특히 종전 직전 역사상 최고의 위력을 지닌 무기, 원폭이 실전에 투입되면서 인류 문명에 경종을 울렸다.


일본 히로시마(위)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최초의 원자폭탄.
일본 히로시마(위)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최초의 원자폭탄.


그렇다면 2차 대전의 대미를 장식한 전율의 무기 원자폭탄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전쟁이 길어지면서 양측은 이론상 가능성이 제기된 치명적인 무기 개발 경쟁에 돌입했다. 독일에서 망명해온 다수의 유대인 과학자가 활동한 영국이 선제적으로 연구에 착수했다. 하지만 당시 영국은 제어된 연쇄반응을 수행할 재원은 물론 신형 폭탄 개발에 필요한 방사성 물질도 충분히 갖고 있지 못했다. 이제 원자폭탄 개발 임무는 인적·물적 자원 대국인 미국 몫이 됐다. 진주만 사태로 미국이 본격 참전하자 영국은 그동안 자국이 축적한 원폭 관련 자료를 미국 측에 이양했다. 핵심 인재들은 직접 연구작업에 동참했다.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저명한 과학자들로부터 미국의 선제적 원폭 개발 필요성을 전해 들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1941년 10월 ‘맨해튼 계획(Manhattan Project)’으로 알려진 원자폭탄 개발계획을 공식 승인했다. 유명한 물리학자인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과학 분야 책임자로, 미 공병대의 그로브스 장군이 행정 분야 책임자로 임명됐다. 네바다 사막 한복판에서 극비리에 연구를 진행했기에 부통령이던 트루먼조차 1945년 4월 루스벨트 대통령 서거 후에야 계획의 전모를 처음 접할 수 있었다. 관련 과학자들은 1945년 여름쯤 폭탄 개발이 완료될 것으로 예측했다.

하지만 이들은 신형 폭탄의 파괴력을 정확하게 예측하지 못했다. 다만 기존 고폭탄을 수천 톤 투하했을 때 얻을 수 있는 강력한 폭발력과 치명적인 방사선을 방출한다는 사실 정도만 인지했다. 폭탄 투하 지점으로부터 적어도 사방 1㎞까지 폭발력이 미칠 것으로 계산됐다. 인류사에 최초로 등장하는 가공할 무기임에는 분명했다.

이제 신형 폭탄을 실제로 사용할 것인가가 관건이었다. 기본적으로 투입 여부는 전황과 연계돼 있었다. 1945년 5월 7일 독일의 항복으로 이제 세계의 시선은 일본군이 있는 태평양 지역으로 집중됐다. 이미 승패는 분명해졌으나 항복이라는 불명예를 피하려는 일본 군부는 여전히 결사 항전을 부르짖고 있었다. 일본 본토에 상륙해 지상전을 전개할 경우, 얼마나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할지 상상하는 것조차 괴로운 일이었다. 이미 이오지마 및 오키나와 전투로 엄청난 인명피해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죽음을 각오하고 덤비는 일본군의 결기 앞에 미군은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 본토 작전을 벌이면 사상자는 적어도 100만 명을 넘어설 것으로 예측됐다.

어떻게 해야 이런 엄청난 인명피해를 피할 수 있을까? 스탈린마저 얄타회담에서 약속한 대일전 참전을 차일피일 미루는 상황에서 미군의 선택 폭은 매우 좁았다. 일본인들에게 원폭의 위력만 과시하자는 의견과 심지어 원폭 투하에 반대하는 목소리까지 제시됐으나, 숙고 끝에 트루먼 대통령은 원폭 투하를 결심했다. 최초의 원폭 실험이 성공했다는 보고를 받고 트루먼은 조속한 시일 안에 일본에 원폭을 투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무엇보다 전쟁을 빨리 종결지어 어떻게든 인명피해를 줄이려는 고뇌에 찬 결정이었다.  


미주리 함상의 일본 항복사절단.
미주리 함상의 일본 항복사절단.


마침내 1945년 8월 6일 이른 아침에 B-29 최신예 전략폭격기가 약 4톤 무게의 우라늄 원자폭탄을 일본군의 주요 병참 항(港)인 히로시마에 투하했다. 불과 2초 후 히로시마 상공 약 580m에서 TNT 1만6000톤에 버금가는 대폭발이 일어났다. 섬광이 비친 한순간에 수만 명이 죽었다. 폭탄이 떨어진 곳은 폭발과 함께 발생한 엄청난 고열로 모든 것이 증기처럼 사라졌다. 3일 후 또 다른 원자폭탄이 미쓰비시사의 군수공장이 있는 나가사키에 투하됐다. 산지(山地)인지라 인명피해는 히로시마보다 덜했으나 전체적인 모습은 한 쌍의 지옥도(地獄圖) 그 자체였다.

두 발의 원폭 세례에 이어서 북만주에서 기회만 엿보던 스탈린의 소련군마저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옴에 따라 마침내 일본 정부는 무조건 항복을 수용했다. 1945년 8월 15일 신적 존재로 군림해온 일왕의 육성이 라디오를 통해 전 전선에 울려 퍼지면서 4년 동안 이어져 온 태평양전쟁이 끝났다. 투하 후 무수한 논쟁에도 불구하고 원자폭탄이 종전을 앞당기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한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인간종(種)의 멸종과 지구 종말을 초래할 정도로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원폭의 출현은 인류에게 중대한 의미를 부여했다. 이후 지구 멸망에 대한 공포심이 엄습하면서 원폭 사용 윤리에 관한 논쟁이 들끓었다.



역사적 영향

2차 대전 종전으로 이제 세계는 평온해진 것일까? 그렇지 않다. 불길한 예감은 이미 전쟁 후반기부터 감지됐다. 세 강대국(미국·영국·소련) 중심으로 대전 중 이뤄진 일련의 회담을 통해 결과적으로 소련의 세력 확대가 두드러졌다. 이에 따른 우려는 전후 곧 현실로 나타났다. 소련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파시즘 대신 볼셰비즘이 새로운 평화의 위협세력으로 대두한 것이다. 이에 뒤질세라 자유민주주의 국가들도 미국을 중심으로 결속했다. 전쟁 중 고양된 평화에 대한 염원과 달리 세계는 다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 진영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 진영으로 나뉘어 대립하게 됐다. 이른바 ‘냉전(冷戰)’ 시대가 도래한 것이었다. <이내주 육군사관학교 명예교수> 사진=필자 제공

※이번 주제를 끝으로 지난 1년 반 동안 이어져 온 ‘역사 속 그때 그는 왜?’의 연재를 끝맺고자 한다. 그동안 필자의 부족한 글을 애독해 주신 전후방 각지의 독자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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