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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영 병영칼럼] 토론의 정석

기사입력 2019. 05. 10   17:15 최종수정 2019. 05. 12   09:59

노 인 영 
과학·미술 칼럼니스트

20세기 과학계 최고의 선물은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이다. 그중 양자 이론은 한 천재의 통찰력이 아니라, 많은 과학자의 고민이 축적되면서 체계화됐다. 그만큼 복잡하고, 이전의 개념으로는 접근하기 어려웠다. 학자 간 치열한 논쟁이 끊이질 않았으며, 그 중심에는 현대 물리학의 거목 아인슈타인과 닐스 보어가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양자 이론에 우연과 확률이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 불편했다. 어떻게 하든 반대 논리를 찾아내려고 애썼으며 종종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말로 거부감을 표시했다. 이런 일이 계속되자 친구인 파울 에렌페스트는 반(半)농담 삼아 이렇게 말했다. “난 자네가 부끄러워. 새로운 양자론에 대해 예전 자네의 반대론자들처럼 반박하고 있네.”

그런데도 아인슈타인은 마지막 25년간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완벽한 이론을 찾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전자기력과 자신의 중력이론을 통합하는 통일장 이론이다. 그러나 진전이 없었고, 세상은 양자역학이 학문적 대세를 이뤘다. 그는 자신이 ‘늙은 바보’로 취급당하는 사실에 쓸쓸해졌다.

오히려 그의 도전이 의미심장했다는 사실을 인정한 인물은 반대편에 선 보어였다. 그는 조용하면서도 매우 사려 깊었다. 스승 러더퍼드가 자신의 아이디어에 무관심해 1921년 프레더릭 소디에게 노벨 화학상을 빼앗겼음에도 존경심을 끝까지 유지했던 인물이다.

아인슈타인 사후 물리학의 근본 문제를 생각할 때면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를 늘 염두에 두었다. 1962년 보어는 심장 발작으로 죽기 하루 전날 밤, 서재 칠판에 그림 하나를 그려놓았다. 1930년 아인슈타인이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원리(양자역학)를 공격하기 위해 사용했던 바로 그 ‘빛 상자’였다. 반박에는 주저함이 없었지만, 자신의 논리에 결함을 찾는 노력에는 아인슈타인과 늘 함께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때는 1차 대전 직후 가난했던 1920년 4월이었다. 아인슈타인이 보어를 찾아왔다. 집에서 저녁 식사를 대접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마침 파업으로 전차가 다니지 않아 약 15㎞ 거리를 걸어야 했다. 아인슈타인 처지에서는 왕복 30㎞를 걸었다는 뜻이다. 헤어진 후 아인슈타인은 보어에게 첫 편지를 썼다. “당신처럼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 큰 기쁨을 주는 사람을 만난 적이 별로 없습니다.” 보어는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1955년 지병으로 쓰러지기 전, 76세의 아인슈타인은 보어에게 마지막 편지를 보냈다. 러셀의 비핵화 선언에 동참을 요청하는 내용이자, 그간의 논쟁에 관한 그의 소회를 밝히는 대목이다.

“그렇게 얼굴을 찌푸리지 말아요. 이것은 물리학에 관한 우리의 오랜 논쟁과는 아무 관계가 없어요. 오히려 우리가 완전히 동의하는 것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한편 통일장 이론은 그의 사후 30년이 지나 물리학에 새바람을 일으켰다. 과학 토론에서도 말하는 이의 인격은 매우 중요하다.


훗날 카를로 로벨리는 말한다. “아인슈타인은 이 새로운 아이디어에 실제로 모순이 없다는 것을, 보어 역시 처음 생각한 것만큼 이론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결국, 두 사람은 토론에 관한 좋은 선례와 함께 위대한 학문적 성취를 인류에게 선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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