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오피니언 > 병영칼럼

[김경 병영칼럼] 서울이라는 너울

기사입력 2019. 05. 09   14:42 최종수정 2019. 05. 09   14:48

김경 국방FM 작가

대개의 것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내공이 쌓이게 마련이지만, 어째 혼자 사는 일에는 왕도가 없는 것 같다. 때로는 지치고 힘에 부쳐 사람이 그립다가도, 때로는 격렬하게 혼자 있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내가 기다릴 사람도, 나를 기다려줄 사람도 없는 빈집에서 오늘도 엎치락뒤치락 여자부 레슬링, 그레코로만형 경기에 단독 출전을 한다.

2006년 2월, 열여섯에 상경했다. 그때 나는 뭐에 홀린 것처럼 반드시, 무조건, 꼭 서울에 가야만 했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이역만리 미국 땅을 밟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관건은 내 몸이 서울 땅을 밟느냐, 못 밟느냐의 문제였다.

지금 생각하면 ‘시골 뜨내기가 무슨 야망을 품고 나 홀로 한양행을 택했을까?’ 싶다. 아무렴 꿈도 좋고, 그 이상도 좋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참 무모하고 겁 없는 도전이었다. 젊음이 좋고 패기는 더 좋았다.

서울 생활은 변기에 앉으면 무르팍이 벽에 닿고, 세면대에 허리를 숙여 세수라도 할라치면 엉덩이와 화장실 문이 썸을 타 ‘므흣했던’ 자취방에서 시작됐다. 빈 곳에 몸을 욱여넣고 5분 샤워를 할 때면, 사방으로 물이 튀어 애꿎은 나무문만 흠뻑 젖곤 했었다. 그 바람에 화장실 문은 조금씩 조금씩 제 살을 깎아 먹으며 삭아갔고, 그런 화장실 문을 바라보는 것은 이 생활의 또 다른 재미였다. 그리고 그것이 몇 편의 시가 됐고, 쓰니까 쓰는 작가의 삶을 무한정 꿈꾸게 했다.

나는 반 평 남짓한 화장실에서 엄마가 가르쳐준 대로 속옷 같은 것을 주무르며 세상을 배웠다. 가끔은 서러웠다. 주인집의 세탁기를 두고도 눈치가 보여 손빨래를 하는 내가 가여웠다.

학교는 더했다. 일찍이 술과 담배를 시작한 미성년 친구들의 객기를 보며,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하는 일은 참 괴로웠다. 마음은 늘 상처 범벅이었고, 남는 건 센 척과 자괴감뿐이었다. 저것이 문학이고 저것이 창작의 심지라면 기꺼이 이 생활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 충격이기도 했다. 서울이라서, 서울이니까 그럴 수도 있는 것이라며 괜한 지역감정으로 스스로를 보듬던 날들이었다.

그렇게 버티다 보니 고등학교와 대학을 졸업하고, 여섯 번의 이사를 한 지금의 내가 있다. 두 번의 회사생활은 일찍이 끝이 났고, 다섯 번째 방송국 생활을 하다 보니 시간은 어느덧 훌쩍, 13년이 흘러 있었다. 인생의 절반을 나 혼자 살았다. 나와 함께 살았다. 이제 63빌딩과 남산타워 같은 것들은 더는 새롭지 않다. 익숙하고 당연한 것들만 남은 이곳이다.

뮤지컬 ‘빨래’의 주제곡 ‘서울살이 몇 핸가요’를 들으며 생각한다. “얻어갈 것이 많아 찾아왔던 여기, 잃어만 간다는 생각에 잠 못 드는 우리.” 서울살이 14년 차, 얻은 것은 지금의 ‘나’이고, 잃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이다.

서울이라는 너울 위에 위태롭게 중심을 잡는 서퍼, 사나운 물결이 삼키고 간 자리에서 다시 일어서고 보는 서퍼, 패들보드를 놓치면 바지라도 벗어 구명조끼를 만들어야 하는 생존 정신! 이게 바로 서울이 만든 짱짱한 프로 ‘서울러(Seouler)’다.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에 대한 의견 개 있습니다. 로그인 후에 작성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