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임시정부100년, 고난의 3만리

경제개혁 위해 사회주의 경제관 대폭 수용하기도

김주연

입력 2019. 04. 05   17:21
업데이트 2019. 04. 05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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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새 국가건설론


전통적인 ‘토지 국유사상’ 투영돼
국제적 친소관계 중>미>러>영 순
中국민당 정부서 물심양면 지원 받아
좌파 독립운동세력과 연대
일제 패망 후 민족분단에 대해 규탄
1948년 김구·김규식 남북협상 앞장

대한민국정부 수립 국민 축하식(1948.8.15)
대한민국정부 수립 국민 축하식(1948.8.15)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새 국가건설론은 무엇인가. 임시정부는 이미 1930년대 초반 독립운동 이념으로 삼균주의를 채택하고, 그에 입각한 정식정부 건국이념으로 1941년 11월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공포했다. 여기에 제시된 임시정부의 새 국가건설론은 자유주의 세계관에 꼭 들어맞는 것은 아니었다.
임시정부가 민주공화제로 성립됐고, 광복까지 27년간 그 체제를 유지해온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민주공화제는 갑자기 성립된 것이 아니라 국민주권을 지향한 민족운동세력의 오랜 투쟁과 고뇌의 소산이었다. 대한제국 시기 신민회 계열 민족운동가들은 공화제를 지향했다. 이는 신민회가 “국권을 회복하여 ‘자유국가’ 또는 ‘자유독립국’을 세우고, ‘공화정체’로 하는 것”을 목표로 한 데서 알 수 있다. ‘제국’에서 ‘민국’을 꿈꾼 것이다.

남북협상 하러 북행하는 김구(1948.4.19)
남북협상 하러 북행하는 김구(1948.4.19)


훗날 신민회 계열 민족운동자들은 임시정부 수립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경술국치 전후 이들이 해외로 망명해 중국의 신해혁명과 러시아의 10월혁명을 경험하고, 미주에서 자유민주주의를 학습하면서 국민주권주의에 대한 신념을 강화한 결과였다. 그래서 ‘대한의 독립과 대한인의 자주’를 선언한 3·1독립운동 과정에서 민주공화제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성립한 것이다. 이후 민주공화제는 임시정부가 어떠한 경우에도 포기할 수 없는 철칙이 됐고, 광복 이후 임시정부를 계승한 대한민국 정부의 정치적 세계관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임시정부의 경제적 세계관은 자유주의 경제관인 자본주의와는 사뭇 다르다. 임시정부의 건국강령이 삼균주의에 입각해 작성, 공포된 새 국가건설론이기 때문이다. 특히 토지국유화와 그 토지의 자력자경인에게 분급, 대생산 기관의 국유화 원칙은 임시정부가 사회주의 경제관을 대폭 수용한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하늘 아래 왕토가 아닌 것이 없다”는 전통적 토지 국유사상이 투영된 것이기도 하다. 나아가 이는 일제의 식민자본과 매판자본을 위한 공업생산 구조와 식민지지주제에 의한 수탈성 농업생산 구조, 그로 인한 광범한 도시 빈민층의 확산과 빈농층의 만연, 그리고 중소상공인의 몰락 등 식민지 계급구조를 파악한 토대 위에서 도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미국·러시아와 우호관계 유지

임시정부의 친일파 척결 의지는 매우 강했다. 임시정부는 친일파의 선거권 및 피선거권을 박탈함으로써, 새 정부 참여를 원천적으로 봉쇄했다. 1945년 9월 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 김구 명의로 발표한 ‘국내외 동포에게 고함’에 명시된 ‘임시정부 당면정책’에도 공개적으로 엄중하게 친일파를 처단할 의지를 밝혔다. 이는 독립운동을 주도해온 임시정부의 강렬한 친일 청산 의지의 표출이자 국내 현실을 감안한 상황인식의 결과였다. 1920년대 이른바 일제의 ‘문화정치’를 통해 빠르게 육성된 친일파와 민족운동에서 이탈한 자치운동세력의 등장, 1931년 9·18 만주침략과 1937년 7월 중일전쟁,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 도발 이래 더욱 광분해 날뛰던 친일 반(反)민족세력의 망동 등을 감안한 선택이었던 것이다.

임시정부의 국제적 친소관계는 기본적으로 친중국>미국>러시아>영국>프랑스의 경향을 띠었다. 임시정부가 친중국 경향이 강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소재지가 상해와 중경 등 중국 관내이고, 1921년 손문의 호법정부로부터 정부 승인을 받은 이래 국민당정부로부터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미국과도 친선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정부수립 초기부터 워싱턴에 구미위원부, 1941년부터는 주미외교위원부를 두고 미국 정부는 물론 정관계 인사들을 대상으로 맹렬한 외교활동을 벌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비록 미국 정부로부터 임시정부가 정식으로 승인을 얻지는 못했지만, 광복 직전 OSS와 합작해 국내진공작전으로 독수리작전을 추진하는 등 미국과도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러시아도 마찬가지였다. 임시정부는 수립 직후 레닌정부에 특파원을 파견해 외교관계를 맺었다. 그리고 레닌정부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받기도 했다. 1940년대에는 대일항전을 목적으로 하바롭스크 88여단 내 한인부대 등 공산주의 독립운동세력과도 연대를 모색하는 등 러시아와도 우호관계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영국·프랑스와도 인연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일선전 포고와 대독선전 포고를 발포해 영·프 연합국을 지지했고, 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를 인도·미얀마 전선에 파견해 영국군을 지원했기 때문이다.



좌우 독립운동세력 통일회의 지지

주목할 것은 좌파 독립운동세력에 대한 인식이다. 임시정부는 좌파 독립운동세력과 대립, 갈등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그를 연대 대상으로 인식했다. 수립 초기에도 좌파 이동휘 계열과 합쳐 통합 임시정부를 발족하고, 1923년에는 좌우 독립운동세력의 통일회의인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지지했다. 1930년대에는 임시정부의 우파 여당인 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이 조선민족혁명당·조선청년전위동맹·조선혁명자연맹 등 좌파진영과 통일운동을 벌였다. 그 토대 위에서 1942년에는 조선민족혁명당을 비롯한 좌파진영과 그 무장부대인 조선의용대를 통합해 우선 군사통일을 이룬 뒤 통일의회를 구성했다. 나아가 1944년에는 좌우 진영이 연합정부를 발족해 광복을 맞이한 것이다. 결국 임시정부의 새 국가건설론은 민주공화제 원칙을 지키면서 좌우 진영을 통일하고, 연합국과의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친일세력 척결과 식민수탈체제를 철폐할 혁명적 경제개혁을 지향한 것이다.

환국 뒤에도 ‘자주독립 민주 통일국가’ 건설이라는 임시정부의 새 국가건설 노선은 변함없이 추구됐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를 결정하자 임시정부 세력이 가장 격렬하게 반대했다. 피땀으로 쌓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지켜야 한다는 소명의식이 가장 큰 이유였지만, 여기에 더하여 임시정부가 그동안 실천해온 새 국가건설 노선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임시정부는 일제 패망 후 미국과 러시아가 38도선을 경계로 한국을 분할 점령하고, 이를 기회로 남북한에 각기 친미·친러 정권을 세우려는 야욕을 꺾기 위해서도 심혈을 다 쏟아부었다. 특히 38도선을 경계로 하는 국토분단에 기반해 민족분단을 획책하는 정치세력에 대해서는 규탄의 목소리와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1948년 분단체제 성립이 가시화되자 임시정부 주석 김구와 부주석 김규식이 앞장서 남북협상에 나선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곧 ‘통일국가’를 지향한 임시정부의 새 국가건설론을 구현하려는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통일국가’, 이것이 바로 과거 임시정부 요인들이 못다 이룬 꿈이고, 현재 우리가 풀어야 할 역사적 과제인 것이다.  사진=필자 제공


<김용달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김주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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