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임시정부100년, 고난의 3만리

[임정 100년 고난의 3만리] 연합국 첩보작전 참여…2차 세계대전 참전국 증명

입력 2019. 03. 22   17:29
업데이트 2019. 03. 24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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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한국광복군의 미국 OSS와 공동작전


  광복군, 미국 OSS와 직접 교섭
대한민국 임시정부 최종 승인 거쳐
‘독수리작전’ 공동 추진
‘국내정진군’으로 불린 국내 침투대원
美 교관들에게 첩보·야전훈련 받아
명령 대기 중 일제 항복, 작전 중지돼  

한국광복군 OSS 합작 기념(1945.9.30. 서안)
한국광복군 OSS 합작 기념(1945.9.30. 서안)



미국은 1942년 6월 미드웨이해전에서 대승하면서 제해권을 장악하고, 1944년 6월 필리핀해전에서 승리하면서 태평양전쟁의 승기를 잡았다. 이제 일본 열도 공략을 앞둔 상황이었다. 그래서 미군은 1945년에 들어와 일본 본토 공격을 위한 중간 거점을 확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의 본토 사수작전을 교란할 첩보공작을 추진했다.

전자는 1945년 2월 이오지마 상륙작전, 같은 해 4월 오키나와 점령작전으로 진행됐다. 후자는 전략첩보기구인 OSS가 맡아 진행했다.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창설된 정보 수집, 유격대 활동, 적 후방 교란 등을 주요 임무로 하는 미국 전략첩보기구다.

한국광복군이 중국에 주둔하던 미국 OSS와 공동작전을 추진한 것도 바로 이때다. 영국군에 이어 두 번째 연합국과 공동작전이었다. 1945년 초부터 진행된 한국인들을 대일전쟁에 활용하려는 OSS의 계획은 첩보작전의 일환이었다.

OSS의 첩보작전은 세 방향으로 추진됐다. 하나는 중국 관내의 광복군을 국내에 진입시켜 첩보작전을 진행하는 ‘독수리작전(The Eagle Project)’이었다. 다른 하나는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동포와 미국령에 수용된 한인포로들을 한국과 일본에 침투시켜 첩보작전을 수행하는 ‘냅코작전(The Napko Project)’이었다. 나머지 하나는 연안지역에 있던 한인 공산주의자들을 만주와 한국, 일본에 침투시켜 첩보활동을 벌이는 ‘북중국첩보작전’이었다.

한국광복군도 1945년에 들어와 중국군사위원회와 오랜 교섭 끝에 ‘한국광복군 행동 9개 준승’이 폐지됨으로써 통수권을 회복했다. 이렇게 되자 광복군 또한 미국 OSS와 직접 교섭해 공동으로 독수리작전을 추진한 것이다.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하려는 광복군과 대일전쟁에 한국인을 이용하려는 OSS의 의도가 맞아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광복군에서는 제2지대장 이범석과 제3지대장 김학규가 OSS와 교섭했다. 광복군과 OSS의 합작은 임시정부의 최종적인 승인을 거쳐 이루어졌다. 그 절차는 세 단계를 거쳐 진행됐다.

첫째 단계는 1945년 4월 1일 한미 양측 실무자들이 회합해 그동안 진행한 군사합작에 대한 협의를 최종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서안 남오대산 OSS 훈련지와 미타고사 입구
서안 남오대산 OSS 훈련지와 미타고사 입구


둘째 단계는 임시정부 주석과 OSS 장교 간 면담이 이루어진 것이다. 4월 3일 사전트(Clyde B. Sargent) 대위가 임시정부청사를 방문, 김구 주석을 면담했다. 이 면담에는 이청천 총사령관을 비롯해 이범석 제2지대장과 김학규 제3지대장이 동석했다. 김구 주석은 이 자리에서 “안휘성 부양에서 도착한 한국광복군훈련반 졸업생 37명을 포함해 가용 인력을 만들어 적극적으로 협조한다”고 하고, 또 “임시정부 요원들을 동반한 연합군의 한반도에 대한 공격작전을 지원한다”고 약속했다. 광복군과 OSS의 합작에 대한 최종적인 결재이자 승인이었다. OSS에서도 ‘독수리작전에 대해 김구 주석과 이청천 장군의 완벽한 승인을 받았다’고 이해했다.

셋째 단계는 임시정부 대표의 중국주둔 미군총사령부 방문이었다. 4월 17일 김구 주석과 외무부장 조소앙이 통역을 대동하고 미군총사령부의 웨드마이어(Albert C. Wedmeyer) 장군을 방문해 “한국인들은 이미 군사정보를 수집하는 데 미국 공작원들과 협조하고 있다”고 하면서 군사합작을 확인했다. 이로써 광복군과 중국에서 활동하던 미국 OSS가 ‘독수리작전’을 매개로 공동작전을 벌이게 된 것이다.

독수리작전을 위한 OSS 훈련은 광복군 제2지대에서 먼저 시작했다. 제2지대 본부가 있던 서안 두곡 인근 남오대산 미타고사에서 50명의 인원이 5월부터 사전트 대위를 교육책임자로 해 미군 교관들에게 첩보교육과 야전훈련을 받은 것이다. 광복군 대원들은 공통으로 무전통신과 독도법을 익히고, 첩보의 중요성과 가치, 첩보의 유형과 수집, 보고서 작성과 심리전술 등 첩보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사격과 폭파, 등반과 도강 훈련 같은 야전교육도 받았다. 교육훈련은 3개월 동안 엄격하게 실시돼 8월 4일 38명이 훈련을 마쳤고, 광복군 대원들의 훈련성과에 대해 교관들은 크게 만족했다. 제3지대의 OSS 훈련은 7월부터 시작됐으나, 훈련 중 일제가 항복해 중지되고 말았다.

OSS 첩보훈련이 완료되자 광복군 대원들의 국내 침투를 위한 작전회의가 8월 7일 서안에서 개최됐다. 임시정부에서는 김구 주석과 이청천 총사령관, 이범석 지대장, 미국에서는 OSS 총책임자인 도노반(William B. Donovan) 소장과 중국책임자 홀리웰(Holliwell) 대령 및 사전트 대위가 참석했다. 여기서 도노반 소장은 “금일 금시로부터 아메리카합중국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적 일본에 항거하는 비밀공작은 시작됐다”고 했다. 한미 공동작전의 실행을 선언한 것이다.

광복군의 국내 진공작전은 세 단계로 계획됐다. 우선은 광복군 대원들을 비행기나 잠수함으로 국내에 침투시킨다는 것이고, 다음은 이들로 하여금 국내에 거점을 확보해 각종 공작과 인심을 선동하는 것이며, 셋째는 OSS와 연락해 무기를 비행기로 운반, 적 후방에서 무장활동을 전개한다는 것이었다.

광복군의 국내 진공작전은 연속적으로 추진될 예정이었다. “나는 원래 제1차로 서안에서 훈련을 마친 청년들을 본국으로 들여보내고, 제2차로 부양으로 가서 그곳에서 훈련받은 청년들도 아울러 본국으로 보낼 예정이었다”는 김구 주석의 회고가 그런 사실을 잘 말해준다. 제2지대에 이어 제3지대에서 훈련받은 광복군 대원들도 국내에 침투시킨다는 계획이었던 것이다.


광복군 제3지대장 김학규와 OSS대원들(1945.7.곤명)
광복군 제3지대장 김학규와 OSS대원들(1945.7.곤명)


OSS와 공동작전에 참여한 광복군 대원들은 ‘국내정진군’이라는 이름으로 각 도 단위로 편성되고 활동구역이 정해졌다. 이제 출발명령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출발명령보다 일본의 항복 소식이 먼저 들려왔다. 김구 주석은 이 소식을 듣고 “천신만고로 수년간 애를 써서 참전할 준비를 한 것도 다 허사”라며 아쉬워했다.

일제의 항복으로 국내 진입작전이 실행되지 못했지만, 영국군에 이은 미국 OSS와의 공동작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이 제2차 세계대전 교전단체이자 참전국으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음을 실증적으로 웅변한 것이다. 자료=필자 제공 

<김용달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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