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독립군의 전설 김좌진

무역상 간판 내걸고 항일독립운동 아지트로 활용

입력 2019. 03. 19   15:36
업데이트 2019. 03. 19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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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제2부 계몽운동에서 항일독립운동으로 ① 상인 김좌진


민족지 황성신문 기자로 한때 활동
선배들의 지성과 조국애 영향 받아
경술국치 계기로 항일독립운동 투신
신민부 계열 민족운동가들과 교류

 
서울과 신의주에 회사 3곳 운영
의병출신·구척장신 장사패 드나들어
일제 감시망 피하려 사업 표방
실상은 독립운동 활동 거점  

김좌진이 이창양행을 설립했던 대관원 자리.
김좌진이 이창양행을 설립했던 대관원 자리.


1910년 8월 29일, 졸지에 ‘조선’도 ‘대한제국’도 사라져 버렸다(이완용과 데라우치 간의 조인은 8월 22일에 완료됐다). 고종이 광무황제가 된들, 조선이 대한제국이라 개명을 한들 아무런 영향이 없었다. 마치 순서대로 될 일이 자연스럽게 진척되듯 나라가 없어졌다. 1904년 ‘한일의정서’를 시작으로 1905년 이름도 없는 조약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뺏기더니 1907년 정미7조약으로 행정권마저 내주고 군대도 없는 나라가 됐다.
1909년에는 기유각서로 경찰권과 사법권마저 박탈당해 이미 나라가 아니었다. 오히려 을사늑약이나 정미조약 때보다 더 조용히 지나갔다. 학부대신 이용직이 반대하며 회담장을 박차고 나간 일 외에는 고관대작이란 작자들 중 자진으로 항거하는 이 하나 없었다. 그런 나라였다. 국새도 찍히지 않은 이상한 문서 하나로 졸지에 ‘대한제국인’들이 ‘일본제국령 조선인(Korean Dependency of the Japanese Empire)’이 돼버렸던 것이다. 반만년 민족사에 처음 당한 치욕이었다.

경술국치는 김좌진으로 하여금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만들었다. 김좌진이 홍성을 떠나 다시 서울에서 활동한 것은 스무 살 무렵이다. 처음에는 홍성과 서울을 오가며 호명학교 업무를 보고 서울의 신민회 등과 교류활동을 했다. 그러다가 서울에 정착하는데, 일제가 대한제국을 병탄하기 전인 이 시기에 김좌진은 수송동의 사범부속학교에서 운영하던 고아원의 총무로 일하면서 황성신문 기자로도 활동했다. 고아원 총무로 재직했다는 의외의 이력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관련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황성신문 기자로 활동한 것에 대해서는 짚어 볼 필요가 있다. 김좌진 장례식에서 낭독됐던 ‘약력’이나 ‘백야실사’ 등에는 ‘황성신문사 사장’을 지냈다고 돼 있으나 이 당시 황성신문사 사장은 ‘유근’이었다. 이 황성신문은 경술국치 후 한성신문으로 제호가 바뀌었다가 한 달을 채 넘기지 못하고 결국 폐간하게 된다. 김좌진이 안승구·김찬수 등과 군자금을 모으다 검거된 후 이 내용을 전한 1911년 4월 5일 자 ‘신한민보’의 기사에 김좌진의 직업이 ‘젼황셩신문긔자’로 나온다.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이 시기에 오히려 김좌진은 시대적 소명의식이 더 강해졌으리라 보인다. 황성신문이 어떤 신문인가? 유근·박은식·장지연·남궁억 등이 활동한 결기의 신문이었다. 한일의정서 게재를 제지당하자 문제 된 기사의 활자를 뒤집어 인쇄한 이른바 ‘벽돌신문’을 내기도 했고 을사늑약 당시에는 ‘시일야방성대곡’으로 온 국민의 통분을 대변한 민족지였다. 이 신문사에서 선배들의 지성과 조국애를 목도했을 김좌진이 황성신문(폐간 시 한성신문)의 폐간을 보며 그저 일상에만 매달렸을 리 만무했다. 오히려 이때부터 김좌진의 항일 무장투쟁이 막을 올린다.


김좌진을 전 황성신문 기자로 표시한 신한민보 기사.
김좌진을 전 황성신문 기자로 표시한 신한민보 기사.


당시 항일운동은 1907년 4월 안창호가 발기하여 만들어진 ‘신민회’가 주축이 됐다. 이 신민회는 당사자 두 명 외에는 서로 알지 못하게 하는 점조직의 비밀결사 단체였다. 회원이 800여 명으로 추정되나 그 명단은 다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확실한 것은 노백린·조성환 등 무관 출신으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던 집단이 대규모로 참여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서울에서뿐만 아니라 훗날 북만주에서도 지속적으로 김좌진과 연계돼 있었다. 특히 신민회는 목표를 ‘국권을 회복하여 자유독립국을 세우고, 그 정치체제는 공화정체(共和政體)로 한다’로 정하고 주요 사업으로 ‘국외에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전쟁에 대비하고, 국외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고 독립군을 창건할 것’을 내세웠다. 김좌진이 신민부 계열의 민족운동가들과 폭넓게 교류하고 ‘청년학우회’에도 참여하고 있었던 점으로 미뤄 보면 최소한 신민부와 이념적 동질성은 갖고 있었다. 윤치영1은 어릴 때 자신의 집(계동 148번지)에서 김좌진과 윤치성, 노백린 등이 군사학에 대해 연구하고 토론하는 것을 직접 보았다고 회고하고 있다.

이즈음 1910년 9월 29일 자 ‘매일신보’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 하나가 실렸다. “조종서·김좌진 씨 등이 한성 내에서 염직회사를 설립할 목적으로 농상공부에 승인을 얻기 위하여 작년 가을에 청원서를 제출하였는데, 수개월이 지났으나 조처가 없다고 하더니 며칠 전에 이 청원을 퇴각하였다더라”란 내용이다. 김좌진이 염직사업을 했다? 쓸 줄은 알아도 벌어 본 적이 없던 김좌진이 드디어 기업가로 변신했다는 말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지트를 만든 것이다. 다음 기사들이 이를 뒷받침한다.

“경술년 정변이 일어나자 시국에 불평을 품고, 관수동에 있는 대관원 자리에 이창양행이란 무역상을 만들어 두고 북간도 신의주 등지에 지점 형식의 기관을 두어(중략) 기회를 엿보고 모종의 준비를 하고 있던 남북 만주와의 비밀 연락을 취하였다고 한다.”2

“잠시도 자리에 앉을 새 없이 맹렬한 활동을 개시한 그는 여가만 있으면 각처를 돌아다니며, 의병을 꾸미던 사람들 중에 두목을 찾아서 의연히 힘을 취하여 지금 관수동에 있는 중국 요리집 대관원 자리에 이창양행이란 간판을 큼직하게 내걸었는데, 그 내용인즉 금고 1개, 석탄 몇 섬과 석유 몇 통을 엉성하게 벌여 놓았을 뿐이요, 그 집에 들고 나는 사람들은 의병 출신 아니면 하루에 삼백리씩이나 걸음을 걷는 사람이나, 구척장신의 장사패들이었다.”3

김좌진은 이창양행 외에도 소립동에 영창상행(永昌商行)을 운영했으며 신의주에는 염직회사를 설립했다. 도대체 김좌진은 무슨 일을 꾸미고 있었던 걸까? 앞의 기사가 말하듯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했던 것이다. 상점으로 가장해 활동거점을 만드는 것은 당시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나선 사람이나 단체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실제로 사업이 잘되면 군자금도 충분히 확보할 수 있고 독립운동자금으로 쓸 수도 있기에 제법 사업에 열중하기도 했다. 1914년에 백산 안의제가 세운 ‘백산상회’가 바로 그런 곳이었다. 그런데 연고도 재주도 없는 김좌진이 신의주에 가서 염직회사를 한다? 이는 김좌진의 다른 속내를 보여주는 일이기도 했다.


<각주>
1 윤치영은 전 공화당 의장이었으며 윤보선 대통령의 숙부이자 윤치성의 동생이다.

2 동아일보, 1930년 2월 15일 자

3 조선일보, 1930년 2월 17일 자

<김종해 한중우의공원 관장/ 예비역 육군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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