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역사속 그때 그는 왜?

남북 노동력 확보 위해 “노예제 폐지-유지” 무력 충돌

입력 2019. 03. 19   15:35
업데이트 2019. 03. 19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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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1863년 1월 링컨은 왜 노예해방령을 선포했을까?(上)


공업 중심 북부와 농업 주축 남부
서로의 경제구조 인정하면서 공존
서부로 영토 확장되자 대립 표면화
남부 흑인 노예 없이는 농장 불가능
노예제 폐지 주장 링컨 대통령 당선
남군, 섬터 요새 포격 전쟁 속으로


남북전쟁 전 미국 남부 면화 농업에 노동력을 제공했던 흑인 노예들.
남북전쟁 전 미국 남부 면화 농업에 노동력을 제공했던 흑인 노예들.


1860년 노예제 폐지를 주창하며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에이브러햄 링컨.
1860년 노예제 폐지를 주창하며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에이브러햄 링컨.

  오늘날 국제정치의 흐름을 쥐락펴락하는 초강대국! 드넓고 풍요로운 땅에 터를 잡은 세계 제일의 경제 대국! 바로 미국을 이른다. 영국 식민지에서 1783년 신생 독립국으로 국제사회에 모습을 드러낸 미국이 그저 순탄하게 현재 위치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독립 후 미국이 하나의 단합된 국가로 나아가는 데 결정적인 분기점은 바로 19세기 중엽 벌어진 남북전쟁(American Civil War, 1861.4~1865.4)이었다. 1860년 대통령선거에서 노예제 폐지를 내세운 공화당의 에이브러햄 링컨(1809~1865)이 당선되면서 수면 아래 잠복해 있던 남·북부 간 갈등에 불이 붙은 것이었다.
이후 약 4년 동안 미국인들은 ‘동족상잔’의 참화를 겪은 다음에야 통합된 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전쟁이라는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링컨은 왜 흑인 노예를 해방하려고 했을까? 남북전쟁 이전 노예제를 둘러싸고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 링컨은 도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노예해방이라는 인류사에 기록될 조치를 단행했을까? 노예해방 선언이 이후 미국사와 세계사에 미친 영향은 무엇일까? 이 글은 바로 이런 의문점들에 대한 답을 찾으려는 한 시도다.

흑인 노예들이 면화 농장에서 일하는 모습.
흑인 노예들이 면화 농장에서 일하는 모습.


역사적 배경

1861~1865년 미국민들은 남·북부로 나뉘어 ‘내전(內戰)’ 성격의 치열한 전쟁을 벌였다. 그 결과 엄청난 인적·물적 손실을 감내해야만 했다. 미국인들이 무력충돌을 벌인 직접적 이유는 노예제도를 둘러싼 노선 차이 때문이었다. 프랑스혁명 이래 세계로 확산한 자유와 평등 이념에 따르면, 노예제도는 폐지돼야 마땅한데 왜 이것이 문제가 됐을까? 특히 남부인들은 왜 그리스도교의 교리에도 어긋나는 노예제에 그토록 집착했을까?

노예제 폐지를 지지한 링컨의 대통령 당선이 남북전쟁의 빌미가 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갈등의 뿌리는 이보다 훨씬 더 깊다. 영국과 벌인 독립전쟁에서 승리, 1783년 파리조약으로 국제적으로 독립을 인정받은 미국인들은 본격적으로 신생국가의 기초를 다지는 과업에 착수했다. 1789년 독립전쟁의 영웅 조지 워싱턴을 필두로 존 애덤스(제2대), 토머스 제퍼슨(제3대) 등이 대통령으로 재임하면서 정치적 안정과 국가 기초를 다졌다. 평화적 정권교체를 통해 19세기 초반 양당 정치체제를 구축했으나 독립 이전부터 배태된 지역별 간극을 메꾸지는 못했다. 합중국의 정치 엘리트들은 상공업 위주의 동북부지역 주(州)들을 중심으로 중앙정부의 권한 강화를 추구한 연방주의 진영과 농업 위주 남부지역 주들을 중심으로 주(州)별 주권의 강화를 강조한 분리주의 진영으로 갈라졌기 때문이다.

국가 탄생 초기에 이런 차이는 심각한 문제로 인식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국가발전에 활력을 불어넣는 장점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하지만 19세기로 접어들면서 가속화된 서부로의 영토 팽창은 지역별 차이점을 심화시켰다. 독립을 달성한 18세기 말 간신히 애팔래치아산맥을 넘었던 영토는 19세기 전반 미시시피강까지, 남북전쟁 즈음에는 대평원 지대와 로키산맥을 넘어 태평양 연안까지 도달했다.


미국 서부개척에 나선 이주민 가족의 모습.
미국 서부개척에 나선 이주민 가족의 모습.


물론 빠른 팽창이 아무런 대가 없이 달성된 것은 아니었다. 잘 알다시피 유럽인이 도착했을 때 북아메리카 대륙은 무주공산(無主空山)이 아니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다양한 인디언 부족이 대륙 전역에 걸쳐 수렵생활을 하고 있었다. 미국의 영토 확장과 더불어 이들은 조상 대대로 생활해온 삶의 터전을 잃고 ‘인디언 보호구역’이라 불린 척박한 땅으로 내몰렸다. 우월한 과학기술력에 힘입어 손쉽게 광대한 영토를 차지한 백인들은 아마도 승리의 환호성을 질렀으리라.

하지만 세상사에 ‘공짜’는 없는 법인지, 서부로의 영토 팽창과 더불어 그동안 잠복했던 골칫거리가 서서히 정체를 드러냈다. 바로 흑인 노예제 문제였다. 사실상 이는 건국 초기부터 미국 사회가 태생적으로 짊어진 아킬레스건이었다. 건국 이후 남부와 북부는 이질적인 경제체제를 지향했다. 자유노동 중심의 공업사회를 지향한 북부와 달리 남부는 면화 재배를 주축으로 한 농업사회를 형성했다. 독립전쟁 이전 담배 재배에 전념한 남부인들은 독립 후 영국 정부의 보조금 폐지 등 불리한 여건이 이어지자 담배 대신 면화 재배로 방향을 바꿨다. 특히 18세기 말 이래 영국 면방직업의 빠른 발전으로 면화 수요가 급증하면서 미국 남부의 면화 농업은 엄청난 호황을 누렸다.


남북전쟁의 출발점이 된 섬터 요새.
남북전쟁의 출발점이 된 섬터 요새.


그런데 문제는 면화 재배의 경우, 집중적인 노동력 투입이 관건이라는 점이다. 이윤 창출을 위해 농장주는 저렴한 노동력을 확보해야만 했다. 인류사 초기부터 내려온 가장 값싼 노동력은 바로 노예노동이 아니었던가. 당연히 식민지 시대 이래 미국 남부에는 아프리카에서 잡혀 온 흑인 노예들이 노동력의 주축을 이뤘다. 19세기 접어들어 남부에서 자본주의적 농업경영이 유행하면서 농장 규모가 점점 커졌고, 더불어 흑인 노예 수도 빠르게 늘어났다. 점차 남부에서는 흑인 노예 없이는 면화농장 경영이 거의 불가능하게 됐다.

이런 지역별 경제 구조상의 차이를 서로 인정하는 한 남부와 북부는 공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서부로 영토가 확장되고 그에 따라 새로운 주(州)가 신설되면서 노예 문제가, 단순히 기본인권 침해 차원을 넘어 남·북부 간 대립을 표면화하는 정치적 문제로 떠올랐다. 1820년 미주리의 주(州) 성립 문제가 첫 시험대였다. 1817년경 주 성립 요건을 갖출 정도로 인구가 늘자 이주민 대다수가 남부 출신이던 미주리는 노예제도를 인정하는 주(州)로 연방에 가입하고자 했다. 문제는 이를 허락할 경우, 당시까지 연방 내에서 백중세를 유지하던 자유주(自由州)와 노예주(奴隸州) 간 정치적 균형이 깨질 수 있었다. 이를 눈치챈 북동부와 북서부 자유주들은 미주리의 노예주 성립을 반대했다. 이런 상황에서 나온 해결책이 바로 1820년 ‘미주리 타협’(미주리를 노예주로 하는 대신 동부에 메인주를 신설해 양측의 수를 같게 유지하고, 이후로 위도 36.30도를 기준으로 그 이남은 노예주로, 이북은 자유주로 정한다는 합의)이었다.

하지만 이는 미봉책에 불과했다. 지속적인 서부로의 팽창으로 신설 주로 연방에 편입하려는 지역이 늘면서 노예 문제가 계속 불거졌기 때문이다. 1850년대 중반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이 제정되면서 노예 문제가 재차 남·북부 간 갈등을 고조시켰다. 이 법은 미주리주·아이오와주 서쪽에서 로키산맥에 이르는 광대한 초원지대를 남북으로 양분해 남쪽에 캔자스, 북쪽에 네브래스카를 조직하고 이 지역에서 노예제도의 인정 여부는 주민 의사에 따라 결정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 법의 제정으로 ‘미주리 타협’이 무효가 되면서 자유주로 인정된 지역에까지 노예제도가 들어설 가능성이 생겼다는 점이다. 이후 이 법의 이상과 현실 간 괴리가 표면화하면서 노예제 지지자와 반대자 사이에 갈등이 심화했다.

급기야 1856년 5월 캔자스에서 두 진영 간에 유혈 충돌사태가 벌어졌다. 심지어 연방의회에서의 물리적 충돌로 의원 1명이 빈사 상태에 빠지는 불상사까지 터졌다. 1860년대에 접어들면서 남·북부는 인내의 한계에 도달했다. 1860년 노예제 폐지를 주창한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양측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1861년 4월 섬터 요새에 울려 퍼진 남군의 포성을 시발로 미국민은 4년에 걸친 전쟁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자료=필자 제공

<이내주 육사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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