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 육군

“충혼·헌신·나라사랑 이어받아 부끄럽지 않는 군인 될 터"

임채무

입력 2019. 03. 19   16:04
업데이트 2019. 03. 19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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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한계석 선생 증손자 육군17사단 한송희 상사


‘항일 의병활동, 6·25전쟁 유공자’의 후손
독립유공자 집안 내력이 평생의 자부심
“더 당당하고 담대한 임무 수행” 다짐   

육군17사단 뇌전대대 한송희 상사가 대대 책임지역인 장도초소 일대에서 증조부 한계석 선생의 사진을 들고 임무수행의 굳은 의지를 다지고 있다.  부대 제공
육군17사단 뇌전대대 한송희 상사가 대대 책임지역인 장도초소 일대에서 증조부 한계석 선생의 사진을 들고 임무수행의 굳은 의지를 다지고 있다. 부대 제공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계승한 국군 장병들의 자부심을 고취하고 독립유공자의 삶을 재조명하기 위해 마련한 특별기획 ‘독립유공자 후손 장병 릴레이 인터뷰’. 오늘은 항일 의병운동으로 대한 독립에 헌신한 한계석 선생의 증손자 육군17사단 뇌전대대 한송희(37) 상사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군인의 길 꿈꾸게 된 집안 내력

한송희 상사는 1906년부터 의병활동을 하다 1909년 11월 친일파의 밀고로 붙잡혀, 10년 동안 옥고를 치른 고(故) 한계석 선생의 증손자다. 또한 6·25전쟁 때 적 포탄에 한쪽 청력을 잃어 국가유공자로 선정된 고 한철수 옹의 손자이기도 하다. 이런 집안 내력에 대해 한 상사는 늘 자부심을 느꼈고, 군인으로서 꿈을 갖는 계기가 됐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 댁에 가는 걸 어찌나 좋아했는지 몰라요. 비록 할아버지가 과묵하셔서 좀 무섭기는 했어도 말이죠. 사실 이유는 따로 있었어요. 현관 옆에 나란히 붙은 ‘독립유공자의 집’, ‘6·25 참전용사의 집’ 현판과 거실 가운데 빛나던 대통령 표창과 건국포장, 애국장이 절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게다가 할아버지께서 말씀해주시는 증조부님의 의병활동은 몇 번을 들어도 지겹지가 않더라고요. 정작 당신께서는 6·25에 참전하셔서 한쪽 청력을 잃으셨지만, 거기에 대해서는 일절 말씀하시지 않으셨어요. 당연한 일로 여기셨던 거죠. 점차 자라면서 이런 사정을 알게 됐고, 대를 이어 대한민국에 헌신하는 군인이 돼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할아버지의 가르침은 한 상사 인생의 가치관으로 자리 잡게 됐다. 또한, 16년 군 생활 동안 주어진 임무라면 경중을 가리지 않고 몰입하는 근원이 됐다. 지금까지 한 상사가 궂은 업무를 마다하지 않는 것은 물론 각종 경연대회나 파견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실제 2011년에는 첫딸이 태어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시점에 인천공항을 방호하는 영종도 화생방 신속 대응팀 임무수행을 위해 석 달간 파견을 가기도 했다.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도 너무나 귀중하고 소중했지만, 그 당시에는 제가 아니면 부대에서 해당 임무를 수행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개인적인 행복도 중요하지만, 임무수행이 국가 안위와 직결돼 있다고 생각해 파견에 임했습니다. 하지만 다시 돌아가더라도 같은 선택을 했을 겁니다.”



아내 김유나 상사, 최고의 전우이자 든든한 지원군

한 상사에게는 최고의 전우가 있다. 바로 평생의 반려자이자 든든한 지원군인 김유나 상사다. 사단 초급부사관 집체교육 과정의 하나로 마련된 강안경계작전 체험에서 동반근무를 하면서 사랑이 싹튼 이들은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서로 의지하며 군 생활을 이어 나가고 있다.

“사랑하는 아내와 가정을 꾸린 이후 행복한 순간도 많았지만, 어려운 순간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2015년도 비무장지대(DMZ) 지뢰 도발 사건 당시 아내와 저 둘 다 비상 대기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딸 채윤이를 친구 집에 맡겨야 했을 때 아버지로서는 속상했지만, 착한 딸은 부모 마음을 단번에 이해해줘 ‘역시 의병의 피가 흐르긴 흐르나 보다’란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웃음). 힘든 순간이었지만, 돌아보면 군인 가족이기에 경험할 수 있는 특별한 순간이었지 않나 싶습니다. 증조부님과 할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아마 흐뭇하게 보시지 않았을까요?”

지난 1일 한 상사 가족은 육군본부의 초청을 받아 뮤지컬 ‘신흥무관학교’를 관람했다.

“딸과 함께 작품을 관람하면서 우리 조상께서 저분들과 같이 나라를 위해 싸우셨다며 설명해줬습니다. 딸이 그러더군요. ‘아빠·엄마도 우리나라가 위험하면 저렇게 나가 싸우는 거지? 나도 커서 국가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어’라고요. 참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증조부님과 할아버지가 떠오르기도 했고 우리 아이들, 그리고 미래의 손자, 손녀들에게 자랑스러운 사람으로 남을 수 있도록 더 최선을 다해 군 생활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짧은 시간이었지만 정말 의미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조부님께 부끄럽지 않은 군인 될 것”

국방일보의 특집기사를 통해 부대에 처음으로 독립유공자의 후손임이 알려지게 됐다는 한 상사는 조부님께 부끄럽지 않은 대한민국 군인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혼자서 자부심을 갖고 있을 때와 부대에 독립유공자 후손인 사실이 알려진 뒤 느끼는 부담감과 책임감의 무게가 많이 다르더군요. 하지만 힘든 여건 속에서도 담대히 적과 싸웠던 선조들의 의지를 본받아 더욱 당당하게 해안경계작전 임무를 수행해야겠다는 다짐을 이번 기회에 확고히 하게 됐습니다. 18살의 어린 나이에 조국의 독립을 위해 기꺼이 청춘과 인생을 희생하신 증조부님과 20대 청춘에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참전하셨던 조부님께 부끄럽지 않도록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군 생활에 임하겠습니다 ” 임채무 기자  


"18세에 의병대에 들어가 임실·장수·순창 등서 활약"
한계석 선생은?


낙촌 한계석(韓桂錫·1888~1939) 선생은 전라북도 임실 출신이다. 1906년 일본의 침략에 항거해 18살이라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민종식(閔宗植) 선생이 이끄는 의병대에 들어가 홍주(현재 충남 홍성 지역)전투에 참가했다. 1907년 이석용 선생이 임실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합세해 임실·장수·순창·진안 등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이후 1908년 11월에는 양인숙·최명칠 선생 등과 함께 임실 갈담리에 있는 일본의 헌병병참소를 기습해 불태우는 등 각지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1909년 9월부터 시작된 일본군의 소위 ‘남한대토벌작전’으로 의병활동에 타격을 받으면서 같은 해 11월 고향인 임실로 잠시 몸을 피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친일파의 밀고로 일본군에 붙잡혀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됐다. 임채무 기자


임채무 기자 < lgiant61@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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