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속 현대 군사명저를 찾아

[현대군사명저] 올리버 폰 브로켐 『만슈타인: 섬멸전과 정치사』

김상윤

입력 2019. 03. 17   15:49
업데이트 2019. 03. 26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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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슈타인: 섬멸전과 정치사』
Erich von Manstein: Vernichtungskrieg und Geschichtspolitik

‘전쟁의 귀재’라 불리는 에리히 폰 만슈타인. 그가 전역한 지 70년이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프랑스 침공 시 회전낫질작전(Operation Sichelschnitt)을 주도했고 이후 크림반도와 동부전선에서 빛나는 전과를 올렸던 신화적 존재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올리버 폰 브로켐 박사의 새로운 저서는 전선의 만슈타인의 모습을 넘어 전후 독일 국방군 재건 과정에서 그가 보여주었던 정신과 노력을 꼼꼼하게 정리하고 있다.

‘전쟁 귀재’ 만슈타인, 히틀러에 맞선 유일한 독일 장군
‘회전낫질작전’ 주도… 크림반도서 1개 군으로 승리한 후 고속 진급 

  

이 책의 제1장에서 저자는 만슈타인의 경력을 간략히 스케치하고 ‘섬멸전’에 이르는 길에 대해 중점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한 경험과 프러시아 독일군의 전통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만슈타인의 군사사상과 정신세계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만슈타인은 작전참모부장으로 히틀러의 외교책략을 군사적으로 뒷받침한 일등공신이지만, 본격적으로 역사에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 전역 기획단계였다. 그는 11군사령관으로 크림반도에서 1개 군으로 승리한 후 원수로 고속 승진했다. 상급대장 진급 후 4개월 만의 원수 승진으로 진급일에 맞춰 계급장을 전달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후 스탈린그라드 6군 구출작전 실패와 쿠르스크 전투는 오히려 짧게 언급된다.

독일 장군 가운데 히틀러 면전에서 히틀러의 의견에 반론을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은 만슈타인 외에는 거의 없었다. 그는 임무형 지휘에 입각해 정치인의 군사작전 간섭에 반대했다. 그가 쿠르스크 전투 후 해임된 것은 독일 국방군을 퇴각시켜 유연하게 작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이것을 용납하지 못했다. 만슈타인 해임 후 독일군은 동부전선에서 주도권을 상실했다. 물러서면서도 역공을 가하는 만슈타인의 용병술을 히틀러는 이해하지 못했다. 사실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만슈타인은 “전쟁에서 모든 것을 지키고자 하는 자는 아무것도 지키지 못한다(Wer im kriege alles bewaren will, nicht bewahrt)”고 말했다.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성과를 달성할 수 없음을 강조한 말이다. 구데리안은 동부전선에서의 수세를 회복하기 위해 히틀러에게 “만슈타인을 국방군 최고사령관으로 임명해줄 것”을 여러 차례 요청했으나 만슈타인을 껄끄럽게 생각한 히틀러는 거절했다. 자기 말을 듣지 않을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전쟁 말기 히틀러에 의해 국가원수에 임명된 칼 되니츠 제독은 물밀 듯 밀려드는 소련군의 진격을 저지하고자 “만슈타인을 국방군 최고사령관에 임명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히틀러의 친위대장이었던 히믈러의 방해로 성사되지 못했다. 만약 임명됐다면 2차 세계대전의 역사는 다르게 기록됐을 것이다.


만슈타인은 히틀러의 주장에 반론을 개진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다. 필자제공
만슈타인은 히틀러의 주장에 반론을 개진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다. 필자제공


전범 재판에서의 만슈타인


사실 전쟁 기간 만슈타인의 전과에 대해 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전후 독일 전범 재판이나 서독 연방군 창설 과정에 만슈타인의 역할에 대한 논의는 많지 않았다. 이 책의 미덕은 전후 정치사에서 만슈타인의 삶을 재조명했다는 점이다. 전체 4개 장 가운데 3개 장이 이 이야기를 다룬다.

만슈타인은 1949년 8월 24일 개최된 함부르크 쿠리오 하우스 군사재판정에 기소됐다. 범죄 혐의는 전쟁법과 전쟁규약을 위반한 혐의로 총 17개 항목에 달했다. 이 중 만슈타인은 유대인 학살, 러시아 정치장교 처형, 전쟁포로와 민간인에게 가해진 신체적 학대와 점령 지역의 혹독한 약탈을 방조한 혐의로 18년 금고형의 유죄판결을 받았다. 특기할 점은 처칠, 리델 하트 같은 저명인사들이 그의 무죄를 변호했다는 사실이다.

그의 변호사는 만슈타인이 국가에서 내리는 명령에 복종했고, 헤이그조약을 비준하지 않았던 볼셰비키 러시아에서의 전쟁에서 규약을 적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전쟁범죄에 연루됐다고 보기 어렵다는 주장을 펼쳤다. 1949년 12월 심슨 장군이 읽은 판결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나는 나의 신념과 상반되는 행동을 하게 됐다. 내가 만일 만슈타인 원수의 입장이었다면 나도 그와 다르게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현재 적용되고 있는 법에 따라 그에게 유죄를 선고한다.”

승전국 연합군이 패전국 독일에게 정치재판을 하고 있음을 자인한 셈이다. 당시 서독이 연합국 일원으로 소련 침략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서 영국은 판결에 고심을 거듭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서독 초대 수상인 아데나워의 국가재건에 대한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 그는 서독 연방군 재건 과정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고 저자는 기록한다. 옛 부하였던 당시 서독연방군 합참의장 호이징거를 통해 나토의 일원으로서 서독군의 임무, 병력 규모, 군제 확립 등 제반 군사업무에 큰 영향을 발휘했다.

정치적 무관심의 해악


1973년 6월 만슈타인이 사망했을 때 언론의 평가는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일간지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지는 “장교들에게 범죄적 사고방식이 만연했었기에 그들의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전쟁 당시 학살에 대한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만슈타인이 그의 회고록에서 잃어버렸다고 주장한 승리들은 전쟁의 고통을 줄여주는 것이 아니라 딜레마를 더 고통스럽게 만들 뿐이다. 반인류적 학살에 군사전문가들이 악용됐을 뿐이다”라고 썼다.

만슈타인의 판단력은 정치적 무관심과 개인적 야망으로 인해 빛이 바랬던 것이다. 군사에만 몰두한 정치적 무관심은 히틀러의 침략전쟁을 암묵적으로 지지했고, 그의 명령을 이행했다. 대다수 독일 고위 장군들처럼 독일군의 야만적 범죄를 적극적으로 저지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가 전후 비난받는 가장 큰 이유다. 오늘날 독일군이 ‘군복을 입은 민주시민’ 교육을 강화하는 것도 바로 이런 정치적 맹목이 가져오는 폐해를 뼈저리게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만슈타인이 2차 대전 최고의 지휘관 중 한 명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독일군 지휘참모대학은 장교가 지향해야 할 표본 인물로 만슈타인을 선정해 교육하고 있다. 미군이 개혁하면서 주목했던 사람도 만슈타인이다. 서방과 러시아에서 그에 대한 연구서가 쏟아져 나오는 것도 그에 대한 이런 평가를 반영한 것이다. 앞으로 어떤 전쟁이 일어나도 만슈타인이 지휘한 것보다 더 큰 규모의 실병 지휘를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만큼 그의 정확한 상황판단과 지휘결심 경험은 값지고 연구할 가치가 있다.

본서는 독불전역을 전문적으로 다룬 칼 하인츠 프리저의 『전격전의 전설』(진중근 옮김) 및 프란츠 쿠로브스키의 『만슈타인과 제2차 세계대전의 결정적 전투국면』(신기업 옮김)과 더불어 그의 작전적 사고와 결심의 배경을 잘 분석하고 있다. 병행해 읽는다면 용병과 전쟁의 정치적 차원에 관한 큰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주은식

한국전략문제연구소 부소장


김상윤 기자 < ksy0609@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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