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나는 왜 태어나던 날 사진에 아빠가 없어?” 군인 아빠, 특히 해군 함정에서 근무하는 많은 아빠가 자녀들에게 이런 질문을 받는다. 함정병과(기관) 장교인 나 역시 예외가 아니다. 항상 아내와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지만, 우리 가족에게는 조금 특별한 사연이 있다.
2009년 3월 13일, 대한민국 해군은 소말리아 아덴만 해역을 통항하는 우리 선박을 해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구축함·검문검색대(UDT)·항공파견대 등으로 구성된 청해부대 1진을 파병했다.
당시 나는 대한민국 최초의 해외파병 전투함이 될 문무대왕함의 추진체계를 관리하는 주기실장으로 자랑스럽고도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됐다. 이역만리 소말리아로 떠나는 그날, 영광스러운 순간이었지만 결혼한 지 6개월 된 신혼에 임신한 아내를 모국에 두고 떠나야 하는 쓰라린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청해부대 1진 대원들은 ‘우리가 가면 길이 된다’는 신념과 자부심으로 똘똘 뭉쳤다. 그러나 ‘처음’이라는 부담감도 함께 짊어졌다. 작전 분야는 물론 군수지원에 관한 정보조차 부족한 상태에서 6개월간의 장기 항해와 파병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은 결코 만만찮은 여정이었다. 특히 함정의 복잡한 무기체계와 24시간 작동해야 하는 기관 장비들이 안전하게 운용되도록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철저한 예방정비로 큰 문제를 미리 방지하고 사소한 고장이라도 생기면 즉각 대처해 나가는 반복된 노력 끝에 파병 기간 중 임무수행에 지장을 줄 만한 일은 한 차례도 없었다.
이러한 노력은 성과로 이어졌다. 청해부대 1진은 기간 중 7차례에 걸쳐 해적들의 직접적인 위협에 놓인 선박을 구출했고, 총 300여 척의 선박에 대해 호송·안전항해 지원 임무를 완수했다. 특히 해적으로부터 피랍 위기에 처한 북한 선박 다박솔호를 구출하고 그들로부터 감사의 뜻을 전해 들은 순간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임무 수행이 한창이던 7월 어느 날, 나는 첫째 아이의 출산 소식을 들었다. 태어난 지 5일이 지나서였다. 예정보다 조금 빨리 태어났지만, 건강하게 태어난 아이와 아내에게 감사했다.
그해 9월 13일, 출항 6개월 만에 청해부대 1진 300명의 대원은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해외파병 전투함 임무를 완수하고 부산작전기지로 복귀했다.
돌이켜보니 결혼 10년 차, 두 번의 출산과 여덟 번의 이사를 하는 동안 출생신고·이사·전입신고는 항상 아내의 몫이었다.
어느덧 만 열 살이 되는 첫째가 묻는다. “아빠, 내가 태어날 때 사진에 왜 아빠가 없어?” “응, 아빠도 정민이가 정말 보고 싶었는데, 그때 아빠는 우리나라 배들을 지키러 해적들이 많이 나타나는 아프리카 바다에 가 있었어.”
청해부대의 열 살 생일. 문득 문무대왕함 기관실에 어느 대원이 적어 놓은 ‘2009년 9월 13일, 우리는 디젤엔진으로 입항한다’는 문구가 떠오른다. 10년 후 오늘도 나는 대한민국 바다와 국민을 지키기 위해 힘차게 항해할 것이다.
“아빠, 나는 왜 태어나던 날 사진에 아빠가 없어?” 군인 아빠, 특히 해군 함정에서 근무하는 많은 아빠가 자녀들에게 이런 질문을 받는다. 함정병과(기관) 장교인 나 역시 예외가 아니다. 항상 아내와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지만, 우리 가족에게는 조금 특별한 사연이 있다.
2009년 3월 13일, 대한민국 해군은 소말리아 아덴만 해역을 통항하는 우리 선박을 해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구축함·검문검색대(UDT)·항공파견대 등으로 구성된 청해부대 1진을 파병했다.
당시 나는 대한민국 최초의 해외파병 전투함이 될 문무대왕함의 추진체계를 관리하는 주기실장으로 자랑스럽고도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됐다. 이역만리 소말리아로 떠나는 그날, 영광스러운 순간이었지만 결혼한 지 6개월 된 신혼에 임신한 아내를 모국에 두고 떠나야 하는 쓰라린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청해부대 1진 대원들은 ‘우리가 가면 길이 된다’는 신념과 자부심으로 똘똘 뭉쳤다. 그러나 ‘처음’이라는 부담감도 함께 짊어졌다. 작전 분야는 물론 군수지원에 관한 정보조차 부족한 상태에서 6개월간의 장기 항해와 파병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은 결코 만만찮은 여정이었다. 특히 함정의 복잡한 무기체계와 24시간 작동해야 하는 기관 장비들이 안전하게 운용되도록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철저한 예방정비로 큰 문제를 미리 방지하고 사소한 고장이라도 생기면 즉각 대처해 나가는 반복된 노력 끝에 파병 기간 중 임무수행에 지장을 줄 만한 일은 한 차례도 없었다.
이러한 노력은 성과로 이어졌다. 청해부대 1진은 기간 중 7차례에 걸쳐 해적들의 직접적인 위협에 놓인 선박을 구출했고, 총 300여 척의 선박에 대해 호송·안전항해 지원 임무를 완수했다. 특히 해적으로부터 피랍 위기에 처한 북한 선박 다박솔호를 구출하고 그들로부터 감사의 뜻을 전해 들은 순간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임무 수행이 한창이던 7월 어느 날, 나는 첫째 아이의 출산 소식을 들었다. 태어난 지 5일이 지나서였다. 예정보다 조금 빨리 태어났지만, 건강하게 태어난 아이와 아내에게 감사했다.
그해 9월 13일, 출항 6개월 만에 청해부대 1진 300명의 대원은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해외파병 전투함 임무를 완수하고 부산작전기지로 복귀했다.
돌이켜보니 결혼 10년 차, 두 번의 출산과 여덟 번의 이사를 하는 동안 출생신고·이사·전입신고는 항상 아내의 몫이었다.
어느덧 만 열 살이 되는 첫째가 묻는다. “아빠, 내가 태어날 때 사진에 왜 아빠가 없어?” “응, 아빠도 정민이가 정말 보고 싶었는데, 그때 아빠는 우리나라 배들을 지키러 해적들이 많이 나타나는 아프리카 바다에 가 있었어.”
청해부대의 열 살 생일. 문득 문무대왕함 기관실에 어느 대원이 적어 놓은 ‘2009년 9월 13일, 우리는 디젤엔진으로 입항한다’는 문구가 떠오른다. 10년 후 오늘도 나는 대한민국 바다와 국민을 지키기 위해 힘차게 항해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