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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두진 문화산책] 사물의 공화국

입력 2019. 01. 31   14:15
업데이트 2019. 01. 31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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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두진 황두진건축사사무소 대표·건축가
황두진 황두진건축사사무소 대표·건축가


종종 캠핑을 간다. 가급적 가볍게, 최소한의 장비만을 갖추기 위해 노력한다. 주 화기는 소형 알코올버너다. 보통 가스버너를 많이 쓰지만, 소음이 심하고 무엇보다 가스통이라는 쓰레기가 나오는 단점이 있다. 알코올은 구하기 쉬운 연료고 탈 때 소리도 나지 않는다. 자연의 정적을 깨지 않기 위한 최고의 선택이다.

그다음으로는 비상시를 대비한 예비 화기가 필요했다. 마침 고효율의 소형 화목 버너가 조용히 관심을 끌고 있었다. 평범한 깡통처럼 생겼지만, 첨단 이론으로 설계돼 나무가 완전히 연소된다고 알려져 있다. 실제로 테스트해보면 땅에 떨어진 나뭇가지 몇 개로 라면 하나를 끓일 수 있을 정도다. 무엇보다 재가 완전히 분말이 될 정도로 성능이 좋다. 적어도 이 두 화기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 최소한의 취사는 가능하다. 그다음으로 조리용 코펠을 갖춤으로써 취사를 위한 기본 장비가 완비됐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이제부터다. 이 세 개의 물건은 서로 약속이나 한 듯 아귀가 딱딱 맞는다. 코펠 안에는 그보다 아주 조금 작은 코펠이 쏙 들어간다. 즉 2인분으로 설계돼 있다. 그리고 그 안에 화목 버너를, 또 그 안에는 알코올버너를 집어넣을 수 있다. 화목 버너는 알코올버너를 위한 훌륭한 바람막이 역할도 한다. 놀랍게도 이들은 모두 서로 다른 세 회사에서 만든 물건들이다. 그 회사들은 아시아와 유럽, 그리고 북미 대륙에 떨어져 있다. 우연인지, 서로 간의 약속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세 가지를 다 더해봐야 크기가 멜론 정도다. 짐의 부피와 무게를 엄청나게 줄일 수 있다.

마치 민주공화국의 시민들처럼 여러 물건이 그 누구의 일방적 지시나 명령 없이 서로 연대하고 협력하는 것을 ‘사물의 공화국’이라고 부르면 어떨까. 막상 이런 관점으로 세상을 둘러보면 비슷한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카메라용 삼각대의 볼트 크기는 2/8인치다. 조명용 삼각대는 3/8인치, 그리고 마이크용 삼각대는 5/8인치다. 체계적인 규격이다. 이들 사이의 연결을 위한 어댑터도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즉, 세 가지 삼각대는 호환(互換)된다. 카메라를 마이크용 삼각대에 끼울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구성된 사물의 공화국은 인간의 삶을 매우 편리하고 단순하게 만드는 데 기여한다.

아쉬운 예도 있다. 호환이 안 되는 안드로이드폰과 아이폰의 충전기가 대표적이다. 만약 이들이 사물의 공화국을 이룬다면 생활은 훨씬 더 편해질 것이고, 지구는 조금 더 자원을 아낄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아폴로 13호’에서 사령선과 달착륙선의 공기정화장치가 호환되지 않아 우주인들이 곤란을 겪는 사례도 여기에 해당한다. 그들은 기지를 발휘해 위기를 넘기지만, 아마도 서로 간에 대화 없이 각자 따로 일한 두 우주선 제작사와 그 엔지니어들을 원망했을 것이다. 그 결과는 ‘사물의 무정부주의’라고나 할 만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군에서 사용하는 각종 장비와 무기 간의 호환성은 과연 어떨까 궁금하다. 그들도 사물의 공화국을 이루고 있을까? 나아가 우리 ‘인간의 공화국’은 과연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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