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07 (토)
기사입력 2019. 01. 25 09:53 최종수정 2019. 03. 06 16:27
![]() |
■ 화성 華城은?
우리나라 성곽의 꽃이자 세계문화유산으로 유네스코에 등재된 수원의 화성(華城)은 정조 18년(1794년)에 축성이 시작 되어 2년 뒤인 1796년에 완공됐다. 정조의 효심, 즉 사도세자의 아들로 비통하게 죽은 아버지의 복위를 위한 효심이 축성의 기본이 됐다. 또한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정조의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겨있다.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연무동에 위치한 이 성은 둘레가 5,744m, 면적은 18만 8040㎡에 이른다. 다산 정약용이 설계했으며 당시의 신기재인 거중기와 활차 등을 활용해 축성됐다. 특히 화살과 창검을 방어하는 기본적인 구조 외에도 총포를 막을 수 있는 근대적인 성곽의 구조를 갖춰 혁신적인 형태의 성으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
화성은 둘레 5,744m, 면적 18만 8040㎡의 규모이다.
포루(砲樓)는 군사들의 대기 시설이다. 휴식장소로도 쓰였으며 유사시에는 감시하고 공격하기 위한 누각이다. 밑에는 돌로 쌓고 중간부분부터는 벽돌로 축조했다. 각루(角樓)는 군사들이 주변을 감시하기 위해 비교적 높은 위치에 세워져 있다. 화성에는 총 4개소가 있다. 위 사진 왼쪽부터 동북포루-동북각루-화홍문으로 이어진다.
![]() |
동북포루(위 사진)는 각건대(角巾臺)라고도 불린다. 선비들이 쓰는 각건과 비슷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 |
![]() |
동북각루(東北角樓 위 사진)는 방화수류정(訪華隨柳亭)으로 불린다. 화성 동북쪽에 군사적 용도로 세운 것으로 화성에서 가장 뛰어나며, 다른 성곽에서는 볼 수 없는 독창성 있는 건축물이다. 루 아래 아담한 연못인 용연(龍淵)이 어우러져 화성의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다.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 남측, 동북각루(東北角樓) 동쪽에 약간 골짜기진 곳, 눈에 잘 뜨이지 않는 곳에 북암문(北暗門)이 있다. 성밖에서 잘 보이지 않듯 암문은 적이 알지 못하도록 만든 출입구 역할을 한다. 사람이나 가축이 통과하기도 하지만 군수품을 조달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 화성에는 암문이 5곳 있다.
![]() |
화성의 동문으로 화홍문(華虹門, 北水門)이 있다. 성문 왼쪽 화강석 벽에 글씨가 선명한 실명판이 눈에 띈다. 방화수류정과 함께한 야경을 담았다. 아래 사진은 화성 안쪽에서 바라본 전경 중 일부다. 앞쪽부터 북동포루-화홍문-동북각루-동북포루.
![]() |
![]() |
팔달문(위)과 함께 화성의 대표적 건축물이 장안문(아래)이다. 화성의 정문으로 성의 북쪽에 위치해 있다. 형태는 팔달문과 거의 비슷하며 서울의 숭례문보다 더 큰 웅장한 모습을 자랑한다. 장안문으로 들어가기 전 옹성의 문 위로 그려진 용의 그림(아래)이 인상적이다.
![]() |
![]() |
서북 공심돈(西北 空心墩)은 정조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만든 것이니 마음껏 구경하라"고 했을 만큼 독창적인 건축 형태로서 역사적·학술적·건축적 가치가 높고, 화성에서만 볼 수 있다. 성 밖의 적 동향을 살필 수 있고 공격할 수도 있다. 치성(雉城)인 아래쪽 부분은 석재로 쌓고 위쪽 벽체는 전돌로 쌓았다.
![]() |
‘화양루(華陽樓)’ 라고도 불리는 서남각루는 팔달문 왼쪽으로, 남포루와 서포루 사이에 위치해 있다. 6칸으로 남북 약 6.36m, 동서 약 4.24m이다. 이곳은 지형상 우뚝 높은데, 이곳을 공략 당하면 적이 성 안으로 진입하기가 쉬워진다. 이를 막기 위해 각루를 세워 방비한 것이다.
![]() |
장수가 성곽 일대를 살펴보며 지휘를 하는 곳을 일컬어 장대(將臺)라고 한다. 화성에는 동장대와 서장대(위 사진)가 있다. 팔달산 정상에 있는 서장대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중층 누각이다.
행궁(行宮)은 왕이 지방에 나갔을 때 잠시 머물거나 전란(戰亂) 때 나라일(國事)을 계속 하기 위해 지방에 별도로 마련한 궁궐이다. 팔달산 동쪽 기슭에 자리한 화성행궁은 576칸으로 정궁(正宮) 형태를 이룬다.
아래 사진에서는 화성행궁의 장락당(왼쪽) 과 봉수당(가운데)이 보인다.
화성 행궁의 정문이 신풍루(新豊樓)이다. 2층 구조의 6칸 규모 누문(樓門)이다. 최초에는 진남루(鎭南樓)라고 불렸으나 정조의 명으로 신풍루라 이름되었다. 정조 때 관군이 익혔던 24가지 궁중 기예인 ‘무예24기’를 연습하는 모습이 보인다.
사진 = 이경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