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역사속 그때 그는 왜?

佛 정부 무능.부패 불안 고조… 英 포위 탈출 쿠데타

입력 2019. 01. 15   16:40
업데이트 2019. 01. 15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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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1799년 나폴레옹은 왜 군사원정지 이집트에서 파리로 귀환했을까?(上)


1798년 5월 이집트 대규모 원정길
승승장구하다 英 해군에 포위 고립
주변 열강 2차대불동맹 결성 佛 압박
국민들 나폴레옹에 불안 타개 기대
英 해군 포위망 뚫고 파리로 귀환
  

이집트 원정 당시 피라미드 앞에 선 나폴레옹을 묘사한 작품.  필자 제공
이집트 원정 당시 피라미드 앞에 선 나폴레옹을 묘사한 작품. 필자 제공
 

역사상 가장 많이 입에 오르내리는 인물 중 한 명! 19세기 초반 유럽 전역을 휩쓴 인물! 당대는 물론 현재도 근대 군사전략의 전범(典範)으로 손꼽히는 인물! 무엇보다 프랑스혁명이라는 역사적 쓰나미 속에서 시골뜨기 초급장교에서 일약 황제 자리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 바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1769~1821)를 일컫는 말이다. 그에 대해 이처럼 다양한 평가를 가능케 한 직접적인 사건은 1799년 11월 벌어진 일명 ‘브뤼메르 쿠데타’였다.
이를 통해 그는 군인에서 정치가로 변신했고, 5년 후 황제로 등극했다. 그런데 그에게 이런 벼락출세 길을 열어준 결정적인 계기는 1799년 10월의 이집트 탈출이었다. 영국 해군의 포위망을 뚫고 1798년 군사원정을 떠났던 이집트에서 파리로 급거 귀환한 것이다. 그렇다면 나폴레옹은 왜 이집트 원정길에 올랐고, 채 16개월도 안 돼 부하들을 남겨놓고 황급히 파리로 돌아와야만 했을까? 탈영 죄에 해당하는 나폴레옹을 왜 파리 시민들은 영웅처럼 환영했을까? 도대체 나폴레옹은 어떤 인물이었기에 사람들을 매료시킬 수 있었을까? 이 글은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을 구하려는 한 시도다.

역사적 배경

1799년 10월 9일 새벽녘, 프랑스 남부 해안도시 칸 인근 생라파엘 항구로 네 척의 소함정이 은밀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괴선박의 접근을 알아챈 항구 요새 지휘관은 위협 포격을 명령했다. 하지만 함정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접근해 왔다. 이때 포격 소리에 놀라 항구로 몰려나온 군중 속 누군가의 입에서 “이집트에서 오는 저 배에 보나파르트 장군이 타고 있다”는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무리가 “그렇다. 와∼”라고 소리쳤고, 그 함성에 주민은 물론 포대 병사들마저 해안가로 내려왔다. 성급한 자들은 ‘프랑스를 구하기 위해 신이 보낸 인물’을 빨리 만나려는 욕심에 보트를 타고 함정에 다가갔다. 예상외의 환영에 한껏 고무된 나폴레옹은 당일 정오 무렵 부두에 발을 디뎠다. 오랜만에 밟는 조국 땅이었다. 상륙 소식은 곧바로 파리를 거쳐 프랑스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도대체 나폴레옹은 왜 이집트에 갔을까? 그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진 걸까? 1798년 5월 중순 나폴레옹은 대규모 병력과 함선을 이끌고 프랑스 남부 툴롱 군항을 출발, 이집트 원정길에 올랐다. 이후 지중해를 장악하고 있던 영국 함대의 추격을 따돌리고 몰타섬을 거쳐 6월 말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항구에 도착했다. 이후 3주 만에 벌어진 이집트 맘루크군과의 ‘피라미드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카이로에 입성, 이집트 장악을 마무리했다.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길에 오른 이면에는 프랑스혁명 말기 국내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과 인도로 가는 길목에 있는 이집트를 점령해 영국의 아킬레스건을 끊으려는 전략적 고려가 있었다.

여기에 고대세계 알렉산드로스 대왕처럼 중동에서 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겠다는 나폴레옹 자신의 야심도 한몫했다. 당시 혁명기 프랑스를 장악 중이던 총재정부의 노회한 정치가들은 약관 28세에 이탈리아 원정군사령관으로 임명돼 연전연승을 거두며 국가적 영웅으로 부상한 나폴레옹의 인기에 큰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그를 권력 중심부에서 멀리 떼어놓을 의도로 이집트에서 영국군을 무찌르라는 임무를 부과했다. 아마 이것이 이집트 원정의 직접적인 요인일 것이다.

나폴레옹 자신이 품었던 야망도 총재정부의 명령을 수용하는 데 일조했으리라 짐작된다. 그는 인도로 향하는 연결망을 단절해 영국을 곤경에 빠뜨림으로써 종국에는 굴복시키고자 했다. 개인적으로는 오스만튀르크, 페르시아, 그리고 인도를 아우르는 광대한 지역을 정복해 알렉산드로스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야망을 실현하고자 했다. 이를 반영이라도 하듯 나폴레옹은 원정길에 프랑스 학술원을 중심으로 편성된 대규모 전문가 집단을 대동했다. 실제 이집트 원정에서 나폴레옹은 이집트 상형문자 해독의 결정적 실마리를 제공한 로제타 스톤을 발견하고, 나아가 향후 프랑스가 이집트학 선두 국가로 올라설 다양한 자료를 수집했다.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 중 벌인 ‘피라미드 전투’를 묘사한 작품. 필자 제공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 중 벌인 ‘피라미드 전투’를 묘사한 작품. 필자 제공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집트를 정복한 나폴레옹은 여세를 몰아 이듬해 2월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방면으로 치고 올라갔다. 해당 지역을 지배하던 오스만튀르크 제국을 상대로 전쟁을 확대한 것이었다. 자파 시까지는 순조롭게 진격했으나, 차후 목표였던 아크레 포위전에서 고전한 끝에 결국 포기하고 카이로로 회군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 서둘러 원정작전을 개시한 것이 화근이었다. 더 큰 고민거리는 이집트 원정군이 지중해 제해권을 장악한 영국 해군에 포위된 채 고립돼 있다는 점이었다. 이집트 상륙 직후 벌어진 아부키르만 해전에서 프랑스 해군이 넬슨 영국 함대의 기습으로 괴멸된 탓에 원정 초반부터 이집트의 프랑스군은 바다로의 출구가 막힌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왜 단신으로 비밀리에 이집트를 탈출해 프랑스로 돌아와야만 했을까? 그가 이집트 원정을 떠난 이래 프랑스 본국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일까? 1794년 여름 이후 프랑스는 5명의 총재로 구성된 일명 ‘총재정부’가 통치하고 있었다. 1793년 6월 이래 1년간 이어진 자코뱅 지도자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로 수많은 사람이 처형되면서 열광하던 초기 민심은 점차 개혁에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심지어 국민공회 내에서조차 공포정치에 두려움을 느끼는 의원들이 늘기 시작했다. 언제 단두대의 칼날이 자신의 목을 겨눌지 몰랐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1794년 7월 국민공회에 등원한 로베스피에르를 전격 체포해 이튿날 처형하는 일명 ‘테르미도르 반동(反動) 사건’이 벌어졌다. 이로써 공포정치가 끝나고 5명의 총재가 권력을 분점하는 총재정부가 들어선 것이었다. 


나폴레옹의 초상화. 필자 제공
나폴레옹의 초상화. 필자 제공

 
하지만 문제는 새로 들어선 정권의 무능과 부패가 이어졌다는 점이다. 공포정치 아래 억눌렸던 다양한 이해관계와 그동안의 원한이 일거에 분출됐다. 왕당파는 부르봉 왕조의 복위를 꾀하고, 자코뱅은 급진정치 재개를 시도하며, 심지어 공산주의에 근접한 이념을 내세운 바뵈프의 봉기 음모까지 있었다. 대외적으로도 프랑스군은 그동안 나폴레옹이 차지한 점령지에서 빠르게 밀려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주변 열강이 제2차 대불(對佛) 동맹을 결성해 공화국 프랑스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불안정이 고조됐다.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 국민은 자국을 구원할 ‘구세주’를 염원했고, 그는 다름 아닌 젊은 장군 나폴레옹이었다. 이집트에서 이런 국내외 정세와 민심을 예의 주시하던 나폴레옹은 탈출작전을 구상하기에 이르렀다.

<이내주 육사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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