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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사 1월11일] 1952년 김두만 공군대위, 100회 출격 대기록 달성

기사입력 2019. 01. 09   14:24 최종수정 2019. 01. 13   09:52

김두만 대위가 100회 출격 임무를 완수하고 귀환하자 동료들이 이 기록을 축하해주고 있다.

6·25전쟁 중 공군의 김두만 대위가 금강산 일대의 적군 보급기지를 파괴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강릉기지로 귀환했다. 활주로에 안착하자 동료들이 달려와 그를 축하해줬다.


1952년 1월 11일 바로 이 날, 김두만 대위는 ‘공군 최초 100회 출격’이라는 역사적인 기록을 달성한 것이다. 


1949년 4월 임관, 훗날 공군 대장으로서 공군참모총장(11대)을 역임한 김두만 장군은 국방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 당시 상황에 대해 "기지로 돌아올 때까지 그런 사실을 잊고 있었다"며 주어진 임무에만 오롯이 집중했었음을 밝혔다.


그리고 "나는 기록(100회 출격)에 대해서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어요. 그날 작전을 마치고 모기지로 귀환하니 동료들이 달려와 기록 달성을 축하해줬어요. 그때까지는 100회 출격 기록 달성 날이란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김 장군에 이어 3개월 후인 4월 6일 이기협, 16일 김금성, 18일 옥만호 소령이 차례로 100회 출격하는 등 전쟁 중 39명의 조종사가 100회 출격의 대기록을 달성했다. 이들의 기록을 포함해 한국 공군의 6·25전쟁 출격은 총 1만 4163회에 이르는데 이는 유엔 공군 가운데 둘째로 많은 전투출격 기록이다.


F-51D 무스탕 전투기에 탑승한 김두만 장군.

김두만 장군은 전쟁 중 F-51D 전투기로 총 102회 출격해 전쟁 승리에 기여했다. 정전 후 제10전투비행단장, 공군작전사령관 등을 역임하면서 공군의 현대화에 매진했다. 또 참모총장 재임 때는 학생군사훈련단과 공군기술고등학교를 각각 설치해 공군의 미래 인재 양성에 앞장섰다.


김 장군은 을지무공훈장(1951년), 은성충무 무공훈장(1953년), 무성충무 무공훈장(1954년),미국 공로훈장(1964년), 2등 근무공로훈장(1969년) 등 다수의 훈장을 받았다.  


국방일보와 인터뷰 중인 김두만 장군.


한국 공군의 살아 있는 전설- 김두만 예비역 대장 

   국방일보 2018년 6월 25일자 


 "조국을 지키기 위해 죽음의 공포를 뒤로하고 비행임무에만 집중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한국 공군의 살아 있는 전설, 김두만(92) 예비역 대장이 국방일보와 만나 6·25전쟁 당시 자신을 비롯한 출격조종사들의 심경을 이같이 회고했다.


1949년 4월 장교로 임관한 김 장군은 그해 10월 대한민국 공군이 창군하는 시점부터 공군과 역사를 줄곧 함께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했고, 김 장군은 당시 한국 공군이 보유한 유일한 항공기였던 T-6 훈련기와 L-5 연락기를 타고 적진으로 출격했다.


"1950년 7월 1일 저녁 무렵, T-6 훈련기에 ‘삐라’를 싣고 북한군에 점령된 서울로 향했습니다. 구름 위를 날아 북악산 방면으로 향했고 서울 상공에 도착해 선회하며 삐라를 뿌렸죠. 삐라에는 ‘미국이 우리를 도와주고 있으니 머지않아 공산군을 격퇴할 것이다. 참고 견뎌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던 것으로 기억해요. 적군의 지배 아래 고초를 겪을 시민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참 아팠습니다. 서울 상공에서 국회의사당 꼭대기에 공산당을 상징하는 붉은 별이 붙어 있는 것을 봤어요. 분통함에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습니다."


김 장군은 1950년 10월 2일부터 대망의 F-51 전투기에 탑승해 전투조종사로서 임무를 수행한다. 노장은 무스탕에 처음 올랐던 당시의 느낌을 ‘황홀해서 죽어도 여한이 없을 정도였다’고 표현했다.


"F-51 무스탕을 처음 타게 됐을 때의 감격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요. 힘차게 발사되는 6문의 기관포, 6발의 5인치 로켓, 2발의 500파운드 폭탄은 나를 황홀하게 만들었죠. 이 전투기와 더불어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김 장군은 1952년 1월 11일 금강산 일대 적군의 보급기지를 파괴하는 임무를 완수하고 무사히 귀환한다. ‘공군 최초 100회 출격’이 달성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그러나 김 장군은 기지로 돌아올 때까지 그런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그만큼 주어진 임무에만 오롯이 집중했던 것이다.


"나는 기록(100회 출격)에 대해서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어요. 그날 작전을 마치고 모기지로 귀환하니 동료들이 달려와 기록 달성을 축하해줬어요. 그때까지는 100회 출격 기록 달성 날이란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죠."


전쟁 중 비행임무는 죽음을 각오해야 할 정도로 위험한 것이었다. 김 장군은 죽음의 공포와 싸우며 1951년 8월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 1951년 10월 대한민국 공군 단독 출격작전, 1952년 1월 승호리 철교 차단작전 등에 참가해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사실, 전쟁 중 전투임무를 수행하면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출격조종사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진 조국과 국민을 지키기 위해서 그러한 두려움을 이겨낸 것이죠."  


김두만 장군이 공군참모총장으로 취임하면서 공군기를 인수하고 있다.


● 다음은 김덕수 공주대 교수가 ‘21세기북스’를 통해 2017년 1월 출간한『항공징비록』에 언급된 김두만 장군의 회고 내용이다.


"전투조종사는 1번 출격이나 100번 출격이나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출격 횟수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위험한 순간에 더 많이 노출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조국에 대한 헌신의 강도가 조금 더 셌다고 말 할 수는 있을 겁니다.


내가 우리 공군 최초로 100회 출격의 기록을 세운 후로 젊은 전투조종사들 사이에서 100회 출격을 달성하기 위한 선의의 경쟁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이 우리 공군에 엄청난 에너지로 작용했고, 적에게는 공포와 전율을 느끼게 했을 겁니다. 나중에는 강릉여고생들이 100회 출격 조종사들에게 꽃다발을 안겨주는 퍼포먼스까지 했습니다. 그 때문에 젊은 전투조종사들의 사기가 충천했습니다.


나는 지금도 그런 분위기가 6.25남침전쟁 때 출격 조종사 129명 가운데 39명의 100회 출격을 가능하게 했던 힘의 원천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나는 최초의 100회 출격 조종사로서 과분한 영광을 누렸습니다. 하지만 나보다 훨씬 더 많은 전투출격을 했던 전투조종사들도 상당수 존재한다는 사실을 후배 공군인들이 기억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214~2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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