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국군 건설의 아버지 이범석

위대한 ‘민족의 우둥불’ 영원히 빛나는 불 되리…

입력 2018. 12. 24   16:41
업데이트 2018. 12. 25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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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끝> 에필로그


16세에 중국 망명 30여 년 항일투쟁
열정·도전과 시대 앞서가는 통찰력
부하들과 동고동락… 청빈한 삶 등
온몸 던져 일평생 오직 애국의 한길
우둥불 리더십, 시대정신으로 자리매김

광복군 2지대장 시절의 철기 이범석. 만주 벌판에서 말 달리던 독립군의 기상이 서려 있다.
광복군 2지대장 시절의 철기 이범석. 만주 벌판에서 말 달리던 독립군의 기상이 서려 있다.

  
철기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메시지는, 대한민국 국군은 항일무장투쟁에 빛나는 독립군과 광복군의 정통성을 계승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연결점에 철기가 존재한다. 우리가 철기를 높이 평가하는 이유다. 철기의 생애는 또한 우리에게 한국적 리더십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지난 1년 동안 연재했던 철기의 일대기 속에 녹아있는 리더십을 소개한다.


우둥불 리더십

첫째, 애국심이다. 이것은 우둥불 리더십의 핵심이다. 철기의 애국심은 자칭 ‘애국’이 난무하던 시절에 진정 몸을 던져 만든 애국이었다. 남에게 ‘애국’하라고 말하는 ‘애국’이 아니라 본인의 몸으로 ‘애국’의 길을 보여준 것이다. 애국심은 지도자의 기본 중의 기본이다.

그가 환국 직전 쓴 글인 ‘구존유금 지재보국(苟存猶今 志在報國)’이 그 정수다. 그의 애국은 비분강개를 바탕으로 하되, 살아서 나라에 보답하기 위함이라는 투쟁 목적으로 이어진다. 비분강개를 넘어 현실적 균형감각을 가짐으로써 우리 가슴에 와닿는다.

둘째, 결단과 초지일관이다. 철기 장군은 16세의 어린 나이에 망명을 결단했다. 결단할 때 결단하는 것이 지도자다. 그리고 열악한 30여 년 중국망명 항일무장투쟁기간을 군인으로 초지일관했다.

셋째, 열정과 도전, 창조적인 삶이다. 철기는 남들이 고등학교 학업에 열중하던 시절 남다른 포부를 갖고 중국 망명길에 올랐다. 운남군관학교 생도 선발부터 청산리전투까지 그의 삶은 열정과 도전정신의 연속이었다.

특히 중국군 소병문 부대에서 보여준 장갑열차 창안은 그의 창조적 자세의 대표적인 사례다. 중국 국민당 정부의 승인 지연으로 광복군 창설이 늦어지고 있었을 때 우선 창설부터 하고 보자는 도전적인 안을 낸 것은 철기였다. 일제의 조기 항복으로 독수리계획이 허무하게 끝나게 되자 지체 없이 국내로 들어가자고 또 한 번 도전적인 안을 낸 것도 철기였다.

초대 국방부 장관 시절, 정치권과 미군고문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당시 공산 북한과의 대결이라는 필요에 따라 국방부 정훈국과 대북 첩보부서를 과감히 설치한 것도 철기였다.

넷째, 시대를 앞서가는 통찰력이다. 청산리전투 이후 공산 러시아행에 관한 격론이 벌어졌을 때 철기는 단연코 공산주의는 우리의 미래가 아님을 주장했다.


광복군 초대 참모장 시절의 모습. 철기의 삶은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으로 이어지는 역사였다.
광복군 초대 참모장 시절의 모습. 철기의 삶은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으로 이어지는 역사였다.

 
광복군이 중국군의 9개 준승으로 대외활동이 제약받고 있을 때는 세계대전 이후를 내다보는 전략적 판단을 했다. 모두 내부 노선투쟁에 몰두할 무렵, 철기는 한미 합작이라는 시대를 뛰어넘는 통찰력과 추진력을 발휘했다. 미국에 대륙세력과 해양세력 사이에서 한반도가 가진 전략적 이점을 인식시킨 첫 사례였다.

다섯째, 후계 세대의 양성이다. 신흥무관학교,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 낙양군관학교 한적군관대 시절 철기는 독립군 양성에 매진했다. 그리고 귀국 이후 민족청년단 창설은 그의 시대를 보는 혜안의 결정판이다.

역사학자 정인보 선생은 “철기 이범석은 치신(治身·몸을 다스리는 것)과 치군(治軍·군을 다스리는 것)이 둘이 아닌 것을 믿었다. 그는 청년들을 훈련한다는 것보다 자신이 청년 속으로 들어가서 같이 울고 같이 뛰고 같이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치고 같이 이 땅 위에 새 엔진이 되자는 소원을 가졌다”고 평가했다.

여섯째, 자주정신과 실용정신의 균형이다. 철기의 생애는 기본적으로 자주정신의 상징이다. 광복군 시절 미군과의 연합작전을 주도하고, 국방부 장관 시절 대한민국 국방기조를 연합국방으로 천명한 것, 그리고 건군 과정에서 국군이 국방경비대를 흡수한 것이나, 동참을 희망한 일본군과 만주군 군사경력자들도 포용한 것 등은 자주정신에 기반한 실용정신의 사례들이다. 철기는 극단의 길을 철저히 배제했다.

일곱째, 지도자의 낭만과 여유다. 철기는 대화할 때 시로 대화한다고 할 만큼 문학적 표현을 많이 사용했다. 광복군 시절에는 항상 서랍에 시집을 간직하고 암송하곤 했다.

문장에 능하고 음악과 예술에 조예가 깊은 철기는 베토벤, 드뷔시, 차이콥스키와 같은 북유럽 가곡을 좋아했다. 무인적인 기질과 예술가적인 감수성을 동시에 갖췄으며, 한번 만나본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인간적인 매력을 지녔다. 균형감 있는 지도자라는 말이다.

여덟째, 고결한 사생활이다. 지도급 인사들의 부정축재가 횡행하고 부적절한 사생활이 판치던 광복 직후 혼란기에 최고위 지도자였던 철기는 재물에 초연한 청렴한 생활을 했다. 항일무장투쟁의 영원한 동지인 김마리아 여사와도 평생을 해로했다.

철기는 관직을 내려놓고 서울의 변두리인 약수동-신당동-대방동 산동네를 전전했다. 특히 대방동 시절에는 식량이 떨어져 두 내외분이 고초를 겪었던 일화도 있다. 지도자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금도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아홉째, 부하들과의 동고동락이다. 무수한 전투에서 그는 늘 전우들과 함께했다. 회고록인 『우둥불』은 군인인 철기의 무한한 애국심과 전우애를 가슴 깊이 느낄 수 있는 산 기록이다.

철기는 광복군 창설 당시 4살 된 아들이 폐렴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부인이 병원에 데려가겠다는 것을 거절했다. 부하의 5살 난 아들의 치료를 제때 지원해주지 못해 죽음에 이르게 했던 미안함 때문이었다.

철기는 부인 마리아가 아들을 살리고자 몰래 병원에 데리고 간 것을 뒤늦게 알고 “당신은 매국노”라며 크게 화를 냈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 아들을 옆에 두고 두 부부는 사흘 밤을 꼬박 새워 간호했다. 가족보다 우선이었던 철기의 동지애를 읽어볼 수 있는 부분이다.



철기가 남긴 시대정신

1년 연재를 시작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결말을 지어야 할 때가 왔다.

글을 쓸 때 우선 철기의 회고록인 『우둥불』, 『철기자전』, 그리고 『철기평전』, 철기의 연설문집인 『민족과 청년』을 참조했다. 사진 자료는 2001년 철기기념사업회에서 편찬했던 『우둥불은 꺼지지 않는다』를 주로 이용했다.

이외에도 독립기념관 편찬자료, 군사편찬연구소 편찬자료, 학자들의 연구자료 등 거의 100여 편 이상의 책과 연구논문들을 참고했다. 특히 기존 자료들 사이의 연결 부분과 배경 부분들을 보강하는 데 노력했다.

부족한 사진 자료들을 얻기 위해 두 번의 중국 현지답사도 병행했다. 매월 편집회의를 통해 조언도 청취했다. 이 자리를 빌려 도움을 주신 모든 분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연재 중에 많은 현역 장병들과 예비역 선후배들, 그리고 철기에게 관심 있는 경향 각지 제현들의 성원과 관심이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졸고를 끌고 나가는 데 큰 힘이 됐다. 필자는 전문적인 작가나 역사학자가 아니다. 단지 이 기회에 ‘군인 철기’라는 우리 근현대사의 격변기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한 위인을 통해 그의 삶에 공감하면서 필자가 생각하는 시대정신을 전하고자 했다.

철기의 100년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20세기 초 이래 항일과 친일, 반공과 용공이라는 두 개의 전선은 아직도 한반도 상공을 맴돌고 있다. 이 글이 독자들에게 혼란의 시대에 작으나마 우둥불과 같은 역할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진=필자 제공

※그동안 성원해주신 독자 여러분에게 감사드립니다. 더 자세한 사항은 철기 이범석 기념사업회 홈페이지나 전화(02-2213-4842)로 문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박남수 철기 이범석 기념사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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