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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상흔 남아있는 민족의 슬픈 분단선

입력 2018. 12. 19   16:19
업데이트 2018. 12. 19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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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국군 경계1번지’ 휴전선의 변천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체결에 의해 휴전선 그어져
초기 국군 방어진지 참호로 연결…북한군 잦은 침투로 골치
1965년 목책 경계선 설치→1968년 Y자형 철책으로 다시 세워
北 지상 침투 어려워지자 해안 공략…해안선 따라 추가 설치  

2017년 1월 23일 경기도 연천군 육군5사단 지역 철책 너머의 일몰 모습.  국방일보 DB
2017년 1월 23일 경기도 연천군 육군5사단 지역 철책 너머의 일몰 모습. 국방일보 DB

휴전선은 대한민국 국군의 경계 1번지다. 오늘날 휴전선은 ‘와이(Y)자형 철책선(鐵柵線)’으로 상징되는 대한민국의 최전선을 일컫는다. 휴전선은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체결에 의해 발생한 것으로, 겨레의 전쟁 상흔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민족의 슬픈 분단선’이다. 그런 점에서 휴전선은 철저히 6·25전쟁의 비극적 소산물(所産物)이다. 그 탓으로 휴전선은 정전협정 체결 후 약 70년을 내려오고 있으나, 여전히 남북한이 군사적으로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는 국경선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정전협정 체결로 생긴 휴전선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된다.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 그리고 남북의 실질적인 경계선 역할을 하는 ‘남방 및 북방한계선’이다. 군사분계선(MDL)은 그야말로 남북을 가르는 국경선 역할을 하고 있고, 그 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각각 2㎞씩 폭 4㎞ 지역이 바로 비무장지대(DMZ)다. 그리고 비무장지대 남쪽 끝이 남방한계선(SLL)이고, 북쪽 끝이 북방한계선(NLL)이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말하는 휴전선은 바로 남방한계선을 지칭한다. 대한민국 국군은 남방한계선에 설치된 ‘와이(Y)자형 철책선’에서 북쪽을 바라보며 대북(對北) 경계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그 세월이 자그마치 65년이다.


강원도 인제 지역의 육군12사단 장병들이 철책선을 따라 경계작전을 하고 있는 모습. 
 국방일보 DB
강원도 인제 지역의 육군12사단 장병들이 철책선을 따라 경계작전을 하고 있는 모습. 국방일보 DB


65년의 역사를 지닌 휴전선에는 처음부터 오늘날과 같은 ‘와이(Y)자형 철책선’이 설치된 것이 아니다. 6·25전쟁이 끝난 후 국군과 미군의 방어진지는 1차 세계 대전 시 방어선과 같이 참호(塹壕)로 연결돼 있었다. 아군 방어진지는 대부분 마대(麻袋)에 흙을 넣은 흙주머니와 나무를 이용해 구축한 것들이었다. 여기에 적을 관측하기 위해 주요 산봉우리에 망루(望樓) 형태의 감시초소를 설치해 북한군을 살폈다. 국군은 그런 상태에서 많은 병력을 투입해 경계를 섰으나, 적의 침투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적은 주로 아군 초소에서 감지되지 않는 낮은 계곡을 통해 국군의 전방부대나 미군 부대를 습격하고, 철도와 주요 산업시설을 폭파하는 등 갖은 만행을 저질렀다.

대한민국 군 수뇌부로서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했다. 그때가 1960년대 중반이었다. 그 대안을 제시한 사람이 바로 6·25전쟁 때 용장으로 명성을 떨친 한신(韓信·13대 합참의장) 장군이었다. 한신 장군은 1964년 8월 6군단장에 부임했다. 부임해서 보니 휴전선을 맡고 있는 예하 사단들이 북한군의 잦은 침투로 골치를 앓고 있었다. 그때 한신 장군이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전방에 널려 있는 아름드리 나무를 베어 ‘X자형 목책(木柵)’을 세우는 것이었다. 한신 군단장은 휴전선을 맡고 있는 예하 사단장들에게 목책을 설치하도록 지시했다. 그것을 보고 있던 육군의 다른 군단에서도 6군단을 따라 목책을 세우게 됐다. 그때가 1965년 상황이었다. 6·25전쟁이 끝나고 12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국경선에 나무로 만든 ‘목책 경계선’이 설치됐다.

그런데 목책 경계선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었다. 목책이 일시적으로 적의 침투를 막는 데는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근본적인 대책으로서는 부족한 점이 많았다. 먼저 목책은 굵은 나무로 돼 있기 때문에 전방의 시야를 가렸고, 그다음은 나무로 경계선을 만들다 보니 쉽게 썩었다. 그리고 그것을 보수하려면 많은 시간과 노력 그리고 엄청난 나무가 필요했다. 휴전선은 동서 250㎞에 달하는 엄청난 길이였다. 1m에 나무 5그루가 필요하다고 치면 125만 그루가 필요했다. 어마어마한 양이 아닐 수 없다. 더군다나 시간이 지나자 북한군은 썩은 목책 사이로 침투해 들어왔다. 근본적인 대책이 절실했다.


통상 휴전선 155마일의 시작점으로 간주하고 있는 한강하구 말도에서 경계작전을 수행하고 있는 국군 장병들의 모습.
통상 휴전선 155마일의 시작점으로 간주하고 있는 한강하구 말도에서 경계작전을 수행하고 있는 국군 장병들의 모습.

 
이제 휴전선의 경계 문제는 전선을 맡고 있는 전방의 지휘관뿐만 아니라 국방부 장관을 비롯한 군 수뇌부로 번졌다. 그때 나온 해결책이 바로 영구적인 ‘와이(Y)자형 철책선’을 설치하는 것이었다. 철책 설치에 대한 아이디어는 김성은(金聖恩) 국방부 장관과 국방부 인사국장 정승화 장군에게서 나왔다. 김성은 장관은 철책으로 된 미8군의 울타리를 보고 생각해 냈고, 국방부 인사국장 정승화(鄭昇和·22대 육군참모총장) 장군은 한신 6군단장 밑에서 부군단장을 할 때 목책의 단점을 보고 ‘와이(Y)자형 철책’을 생각한 바 있었다. 그런데 마침 김성은 장관이 그런 문제로 고민하자, 장관실로 들어가 이를 건의하게 됐다. 두 사람은 바로 휴전선에 철책을 설치하는 데 공감했다.

그렇게 됨으로써 휴전선에 ‘와이(Y)자형 철책선’ 설치가 급물살을 타게 됐다. 김성은 장관은 즉각 국방부 시설국장인 김묵(金默·육군소장 예편) 장군을 불러 소요 예산을 산출하도록 지시했고, 김 장관은 이를 갖고 미8군사령관을 찾아가 해결했다. 육군에서는 강원도 양구에 주둔하고 있는 21사단에 시범적으로 철책선을 설치하도록 했다. 21사단이 성공적으로 철책선을 설치하자, 전 휴전선에 ‘와이(Y)자형 철책선’을 설치하게 됐다. 이로써 오늘날의 휴전선의 모습이 갖춰졌다. 그때가 1968년이다. 휴전이 된 지 실로 15년 만에 이룬 국군의 쾌거였다.

휴전선 철책 설치 작업은 간단했다. 시멘트로 기초공사를 한 후 그 위에 쇠말뚝을 세우고, 그 사이에 ‘철망(쇠 그물)’을 치면 됐다. 그리고 철망 맨 꼭대기는 적이 쉽게 타고 올라올 수 없도록 Y자 형태로 벌려 놓았다. 철책은 나무로 만든 목책과 달리 썩지도 않고, 철조망 사이로 전방도 잘 보였다. 경계 병력도 대폭 감소했다. 효과 만점이었다. 여기에 적의 야간침투에 대비해 전등을 설치하고, 나중에는 철책선 감시와 경비 감독을 철저히 하기 위해 철책선 후방을 따라 자동차 순찰 도로를 만들었다.

이후 국군은 철책선 설치를 해안선으로 확대했다. 서해안은 임진강 대안을 따라 한강의 행주 나루터와 김포반도로 이어졌고, 동해안은 고성-강릉-주문진 연안까지 설치됐다. 동서 해안선에 철책을 설치한 것은 휴전선에 철책이 설치되자, 지상침투가 어렵게 된 북한군이 해안을 이용해 침투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해안선 철책 설치는 대성공이었다. 국군에 의해 휴전선과 해안선에 철책이 설치돼 침투가 어렵게 되자, 북한군은 휴전선 일대에 땅굴을 파게 됐다. 그렇지만 북한의 그런 침투와 도발은 국군의 완벽한 방어태세에 의해 무력화됐다. 이것이 바로 정전협정 체결 이후 약 70년을 이어온 ‘휴전선의 국군 역사’다. 그런 점에서 보면 휴전선은 국군과 애환(哀歡)을 함께 나눈 ‘대한민국의 국방 역사’이기도 하다.

<남정옥 전 전사편찬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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