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백과 항공기 전투기

F-51 무스탕 (하)

입력 2018. 12. 18   09:48
업데이트 2019. 06. 27   10:58
0 댓글

운용 8년간 공군사에 뚜렷한 발자취 남긴 전설적 전투기


승호리철교 폭파에 나선 한국 공군의 활약상을 그림으로 담아낸 호국화. 대한민국 공군 제공
승호리철교 폭파에 나선 한국 공군의 활약상을 그림으로 담아낸 호국화. 대한민국 공군 제공


"여러 전투기를 타 봤지만 머스탱(Mustang·무스탕)이 제일 조종하기 까다로웠다. 별명처럼 마치 야생마 같은 전투기라 익숙해지기 전에는 조종하기 힘들지만 잘 길들이면 뛰어난 성능을 발휘한다." (김신 전 공군참모총장)


"강력한 힘과 빠른 속도, 튼튼한 기체, 중무장까지 머스탱에 완전 매료됐다."(김두만 전 공군참모총장)


"머스탱은 우수한 전투기다. 다소 무겁기는 하지만 힘이 좋고 중무장할 수 있으며 항속거리도 길었다. 위급할 때 무리한 조종을 해도 잘 견디는 든든한 전투기다."(권성근 전 공군작전사령관)


6·25전쟁 당시 F-51 머스탱(Mustang) 전투기를 직접 조종한 공군 원로들의 평이다.


‘무스탕’이라는 발음으로 더 익숙한 이 전투기는 공군 원로들의 평가처럼 무척 평판이 좋았던 ‘전설’적인 전투기였다.


머스탱은 1940년 미국의 노스 아메리카(North America) 항공사가 설계·제작한 항공기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전투기 중 가장 성능이 우수한 전투기 중 하나로 손꼽힌다.


유럽에 전쟁의 폭풍이 몰아치던 1939년 영국은 자국산 허리케인과 스피드 파이어 전투기 생산에 매진하는 한편 미국에 무기 구매 시찰단을 보내 미국산 전투기를 구입하려 했다. 자국 생산 전투기 수량만으로는 소요량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영국이 미국에서 구입 가능한 전투기는 커티스(Curtiss) 항공사의 P-39·P-40 전투기뿐이었다. 이 전투기들은 당시 영국이 보유한 전투기보다 성능상 열세였지만 생산 능력이 부족한 영국으로서는 대안이 없었다. 문제는 커티스 항공사의 생산량도 미군의 소요를 감당하기조차 부족했다는 점이었다. 영국은 미국의 노스 아메리카 항공사 같은 다른 항공기 제조사에서 커티스사로부터 라이선스를 받아 P-40기를 생산하려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노스 아메리카사는 라이선스 생산 대신 120일 안에 우수한 성능의 새로운 전투기를 제작해 주겠다는 제안을 영국 공군에 제시했다. 그렇게 짧은 기간에 성능이 보증된 신형 전투기를 제작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지만 영국 공군은 도박하는 심정으로 계약을 체결했다.


1940년 9월9일 머스탱의 원형인 NA-73X기가 완성됐다. 120일에서도 일주일이나 빠른 102일 만의 일이었다. 영국은 처음에는 320기를 주문할 예정이었으나 최종적으로 총 620기를 생산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1940년 12월 영국 공군은 이 새로운 전투기에 머스탱 I형(미국 A형)이라는 이름을 부여하게 된다.


하지만 머스탱 I형은 원했던 만큼 성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미국제 엘리슨 엔진을 탑재한 머스탱은 고공으로 올라갈수록 기동성이 급격히 떨어지는 단점이 있어 전투기가 아닌 지상 공격기로 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우연한 사건을 계기로 머스탱은 화려한 변신의 기회를 잡게 된다. 1942년 4월 영국 롤스로이스사의 시험 비행 조종사인 로널드 하커가 영국 공군의 권유로 머스탱을 시승하게 된다. 하커는 머스탱의 화려한 기동에 반해 버리고 말았다. 어째서 공군이 이 우수한 전투기를 고작 지상 공격기로 쓰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길 정도였다. 


그러나 하커의 이 궁금증은 이내 풀렸다. 전투기의 고도를 올리자 기동이 급격히 둔화돼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던 것이다. 시승을 마친 하커는 문제가 엔진 탓이라고 생각, 관계자에게 머스탱의 기체 설계는 최고인데 궁합이 전혀 안 맞는 엔진을 달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미국제 머스탱 기체에 영국제 롤스로이스 멀린(Rolls-Royce Merlin) 엔진을 다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결과는 대성공. 멀린 엔진을 얹은 영국 공군의 머스탱 III형(미국 B·C형)은 고도 7800에서 시속 710kph(440mph)라는 엄청난 속력에 도달했고 항속거리가 우수했다. 이제 무거운 짐을 벗어 던지고 넓디넓은 초원을 질주하는 야생마 모습을 찾게 된 것이다.


미국 항공대도 이런 성과에 자극받아 영국제 롤스로이스 멀린 엔진을 탑재한 머스탱을 대량으로 운용하게 됐다. 이때부터 머스탱은 독일 본토를 폭격하는 미국의 장거리 폭격기를 성공적으로 엄호, 연합국 군대가 독일군을 격파하는 데 결정적 공헌을 했다.


1944년 중반부터 생산된 D형은 머스탱의 완성판이라고 할 수 있다. D형은 전 방향 시야가 탁 트인 새로운 물방울형 캐노피가 채택됐고 각 주익에 3정씩 12.7mm 기관총을 설치, 총 6정으로 화력을 보강했다.


한국 공군이 50년 7월 도입한 머스탱도 바로 이 D형이다. 


F-51D 인수식 장면. 대한민국 공군 제공
F-51D 인수식 장면. 대한민국 공군 제공


■ 기사 원문 

   국방일보 기획 ‘무기의 일생’ 김병륜 기자 2004년 10월 5일자 


한국 공군에 10대 최초 도입 6·25전쟁 첫날 북한의 야크 전투기가 한국 공군의 김포비행장을 공격해 왔다. 전투기가 단 한 대도 없었던 공군은 마땅한 대응 수단을 찾지 못한 채 발만 구를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처지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에게 전투기를 원조해 줄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전투기를 제공해 달라는 한국 정부의 요청을 2년 넘게 거절하던 미국도 막상 전쟁이 발발하자 입장을 바꿨다. F-51 머스탱 전투기를 한국 공군에 제공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한 것.


김정렬 공군참모총장은 F-51 머스탱 전투기 도입 준비 차원에서 1950년 6월26일 10명의 조종사를 선발, 일본 이타즈케(板付)의 미군 기지로 급파했다.


일본에 파견된 조종사들은 시시각각 악화돼 가는 전쟁 상황에 조바심을 낼 수밖에 없었다. 서울이 함락됐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 오는 등 고국에서 들려오는 뉴스는 안타까운 이야기뿐이었다.


더구나 일본 현지의 날씨가 계속 흐려 6월26일부터 30일까지 단 한 번도 F-51 머스탱의 비행훈련을 실시할 수 없었다. 7월1일 이타즈케 미군 기지의 하늘이 맑게 갰다. 이날 파견된 조종사 중 일부가 처음으로 비행훈련을 받을 수 있었다. 7월2일 한국 조종사들은 F-51 머스탱을 몰고 이륙한 후 곧바로 기수를 돌려 한국으로 향했다.


김성룡 전 공군참모총장은 "당시 비행한 횟수는 단 1회이며 비행 시간도 평균 30분 정도"라고 증언했다. 당시 기준으로 새로운 전투기에 탑승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30시간의 비행훈련이 필요했다. 여기에 지상교육까지 포함하면 더욱 많은 교육 시간이 필요했으므로 한국 공군은 최소한 한 달 정도의 교육 기간을 예상했다.


출격에 나서고 있는 F-51D 편대. 대한민국 공군 제공
출격에 나서고 있는 F-51D 편대. 대한민국 공군 제공


하지만 전황이 너무 급박한 탓에 급히 한국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2일 한국에 도착한 조종사들은 다음 날인 3일부터 곧바로 출격에 나섰다.


당시 10명의 F-51 머스탱 조종사 중 한 명인 강호륜 공군 예비역 준장은 "실질적인 공격 효과를 기대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태극 마크를 단 전투기를 국군에 보여 주기 위해 출격을 감행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4일 당시 한국 공군에서 가장 비행 경험이 풍부한 조종사 중 한 명이었던 이근석(준장 추서) 대령이 F-51 머스탱을 몰고 출격 중 서울 관악산 부근에서 적 전차를 파괴한 뒤 적의 대공 포탄에 피격, 전사하는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했다.


故 이근석 장군.
故 이근석 장군.


이후 F-51 머스탱은 경험이 풍부한 미 고문단·미 공군과 협조 하에 연합 작전을 전개하게 됐다. 경험이 부족한 한국 공군이 단독 출격으로 귀중한 조종사를 손실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공군의 F-51 머스탱이 다시 단독 작전을 감행하게 된 것은 1951년 10월부터였다. 이때부터 머스탱은 원산·평양 등 적 후방으로 깊숙이 침투, 후방 차단 작전 임무를 수행했다. 


F-51 머스탱이 실전에서 거둔 가장 주목할 만한 작전은 평양 승호리 철교 차단 작전이다. 승호리 철교는 평양 동쪽 10km에 위치한 교량으로 적의 군수 물자를 중·동부 전선으로 수송하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었다.


미 5공군은 여러 차례 승호리 철교를 폭격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미 공군은 한국 공군에 승호리 철교 폭파 임무를 인계했다.


1952년 1월12일 한국 공군10전투비행전대의 F-51 머스탱 5대가 승호리 철교에 폭탄을 투하했으나 작전은 실패했다. 폭탄이 철교 교각 사이의 모래나 강물 속에 떨어지고 말았던 것.


고민하던 10전투비행전대장 김신(전 공군참모총장) 대령은 폭격 방법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8000피트 고도에서 강하해 3000피트 고도에서 폭탄을 투하하던 방식에서 4000피트 고도에서 강하해 1500피트 고도에서 폭탄을 투하하는 초저공 폭격 전술을 택한 것이다. 이 방법은 위험 부담이 높았으나 한국 공군의 명예를 걸고 승호리 철교를 반드시 폭파하겠다는 의지에서 나온 조치였다.


1951년 1월15일 한국 공군의 F-51 머스탱 2개 편대 6대가 김대령의 새로운 폭격법에 따라 승호리 철교를 파괴하는 데 마침내 성공했다. 한국 공군이 미 공군에 뒤처지지 않을 만큼 성장한 것을 대내외에 과시할 수 있는 성과를 거둔 것이다.


한국 공군이 최초로 도입한 F-51 머스탱은 10대였지만 전쟁 중 계속 충원돼 1953년 휴전 당시 공군은 총 80대의 F-51 머스탱을 보유했다. 이후 F-86 등 제트기가 본격적으로 도입되면서 F-51 머스탱은 1956년 8월5일부터 조종사 훈련용으로 전환됐으며 1957년 6월29일 완전 퇴역했다.


머스탱의 운용 기간은 단 8년에 불과했지만 어떤 전투기보다 공군 역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전설 속의 전투기라고 할 수 있다.


F-51 무스탕 (상)


■ 기사 원문 

    국방일보 기획 ‘무기의 일생’ 김병륜 기자, 2004년 10월 7일자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댓글 0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