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말 경북 울진의 죽변이라는 마을에 초등학교 가을 운동회가 있었다. 1학년 아이들이 다섯 명씩 달리기를 했다. 아이들은 3등까지 주는 상을 받기 위해 열심히 뛰었다. 경기 중간에 여자아이 하나가 넘어져 울었지만 다른 아이들은 지나쳐 갔다. 1등으로 달리던 남자아이는 뒤를 돌아보더니 경주를 멈췄다. 우는 여자아이 곁에 가서 일으켜 세우더니 함께 절뚝거리며 결승선을 나란히 꼴찌로 들어왔다. 아동문학가인 이현주 목사는 30년도 더 된 이 일을 얘기하면서 자신이 그 학교 교장이었다면 그 두 꼴찌에게 최고상을 주었을 것이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친구가 넘어졌는데 보고도 모른 척하고 달려가서 1등 하는 것보다 뒤돌아가서 같이 꼴찌로 들어가는 게 아름답지 않나?”
그렇다. 인간은 이웃을 위해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고 때로는 희생할 수 있는 존재다. 인간의 성숙함은 자신을 비워 이웃의 부르짖음에 응답함에 있지 않은가? 어린 아기에서 성숙한 사람이 될수록 자신을 비워 삶의 자리에 이웃을 맞이할 공간을 마련하지 않던가? 자기 중심성에서 타자 중심으로 조금이나마 옮겨가는 것이 사람됨이요, 성숙함이다. 그 배움의 과정에 충실하게 응답하는 것이 진정한 삶이다. 하지만 필자 역시 얼마나 많은 순간 자기에게만 몰두한 채 살고 있는지 스스로 돌아보게 된다. 아브라함 헤셸은 인간성의 반대는 야수성이라면서 “야수성이란 이웃 사람의 인간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 그의 요구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아브라함 헤셸의 『누가 사람이냐』 중에서)이라고 말한다. 고통받는 이웃의 신음과 부르짖음을 나를 향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책임을 느끼고 연대를 선택하는 것이 성숙의 지표이고, 진정한 사람됨의 조건이다.
우리가 사는 신자유주의 시대를 흔히 승자독식 시대라고 한다. 우리는 한정된 재화를 더 얻기 위해 더 좋은 경력과 능력으로 자신의 가치를 높이고 사다리의 가장 높은 곳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끊임없이 경쟁한다. 인생길에서 우리는 매 순간 선택의 갈림길에 선다. 하나는 ‘홀로’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함께’의 길이다.
홀로의 길은 이웃에게 무관심하고 자기에게만 몰두하는 ‘야수성’이 그 특징이다. ‘함께’의 길은 이웃의 신음과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고 함께 서는 ‘인간성’이 그 특징이다. 홀로의 길은 부조리한 현실에서 인생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이웃을 외면한 채 자기의 욕망을 추구하는 길이다. 함께의 길은 신음하는 이웃의 곁으로 다가가서 “내가 여기 있습니다” 응답하고, 세상의 부조리를 조금이나마 개선하기 위해 자기 욕망을 비우는 길이다.
유대인들은 자녀들에게 “네가 태어나기 전의 세상보다 네가 떠날 때의 세상이 더 나은 곳이 되게 살라”고 가르친다 한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바뀌는 건 없다는 절망의 속임수에 귀를 막고, 때로는 비틀거리며 넘어질지라도 홀로의 길이 아니라 함께의 길을 걷자. 그러면 그 언젠가 내가 좋아하는 노래 가사처럼 “오래 황폐하였던 이 땅 푸른 의의 나무가 가득한 세상 우리 함께 보리라.”
1970년대 말 경북 울진의 죽변이라는 마을에 초등학교 가을 운동회가 있었다. 1학년 아이들이 다섯 명씩 달리기를 했다. 아이들은 3등까지 주는 상을 받기 위해 열심히 뛰었다. 경기 중간에 여자아이 하나가 넘어져 울었지만 다른 아이들은 지나쳐 갔다. 1등으로 달리던 남자아이는 뒤를 돌아보더니 경주를 멈췄다. 우는 여자아이 곁에 가서 일으켜 세우더니 함께 절뚝거리며 결승선을 나란히 꼴찌로 들어왔다. 아동문학가인 이현주 목사는 30년도 더 된 이 일을 얘기하면서 자신이 그 학교 교장이었다면 그 두 꼴찌에게 최고상을 주었을 것이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친구가 넘어졌는데 보고도 모른 척하고 달려가서 1등 하는 것보다 뒤돌아가서 같이 꼴찌로 들어가는 게 아름답지 않나?”
그렇다. 인간은 이웃을 위해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고 때로는 희생할 수 있는 존재다. 인간의 성숙함은 자신을 비워 이웃의 부르짖음에 응답함에 있지 않은가? 어린 아기에서 성숙한 사람이 될수록 자신을 비워 삶의 자리에 이웃을 맞이할 공간을 마련하지 않던가? 자기 중심성에서 타자 중심으로 조금이나마 옮겨가는 것이 사람됨이요, 성숙함이다. 그 배움의 과정에 충실하게 응답하는 것이 진정한 삶이다. 하지만 필자 역시 얼마나 많은 순간 자기에게만 몰두한 채 살고 있는지 스스로 돌아보게 된다. 아브라함 헤셸은 인간성의 반대는 야수성이라면서 “야수성이란 이웃 사람의 인간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 그의 요구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아브라함 헤셸의 『누가 사람이냐』 중에서)이라고 말한다. 고통받는 이웃의 신음과 부르짖음을 나를 향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책임을 느끼고 연대를 선택하는 것이 성숙의 지표이고, 진정한 사람됨의 조건이다.
우리가 사는 신자유주의 시대를 흔히 승자독식 시대라고 한다. 우리는 한정된 재화를 더 얻기 위해 더 좋은 경력과 능력으로 자신의 가치를 높이고 사다리의 가장 높은 곳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끊임없이 경쟁한다. 인생길에서 우리는 매 순간 선택의 갈림길에 선다. 하나는 ‘홀로’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함께’의 길이다.
홀로의 길은 이웃에게 무관심하고 자기에게만 몰두하는 ‘야수성’이 그 특징이다. ‘함께’의 길은 이웃의 신음과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고 함께 서는 ‘인간성’이 그 특징이다. 홀로의 길은 부조리한 현실에서 인생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이웃을 외면한 채 자기의 욕망을 추구하는 길이다. 함께의 길은 신음하는 이웃의 곁으로 다가가서 “내가 여기 있습니다” 응답하고, 세상의 부조리를 조금이나마 개선하기 위해 자기 욕망을 비우는 길이다.
유대인들은 자녀들에게 “네가 태어나기 전의 세상보다 네가 떠날 때의 세상이 더 나은 곳이 되게 살라”고 가르친다 한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바뀌는 건 없다는 절망의 속임수에 귀를 막고, 때로는 비틀거리며 넘어질지라도 홀로의 길이 아니라 함께의 길을 걷자. 그러면 그 언젠가 내가 좋아하는 노래 가사처럼 “오래 황폐하였던 이 땅 푸른 의의 나무가 가득한 세상 우리 함께 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