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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국군 최초 독자적 전쟁대비계획 수립

입력 2018. 12. 05   16:13
업데이트 2018. 12. 05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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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자주국방의 서곡(序曲) ‘태극72계획과 무궁화회의’


60년대 말 안보환경 악화…1971년 대통령 신년사 자주국방 역설
육본 전쟁기획실서 한국형 방어·반격계획인 ‘태극72계획’ 수립
육군 장성급 지휘관 모여 1973년 전쟁 계획 보완 첫 토의 개최
1984년부터 합참 주관…군 정책·전략 논의 3군 장성 토론의 장


2013년 6월 미 참전전우회장이 무궁화회의에 참석해 강연하는 모습.   국방일보 DB
2013년 6월 미 참전전우회장이 무궁화회의에 참석해 강연하는 모습. 국방일보 DB
2015년 6월 2박3일 일정으로 열린 무궁화회의 모습.
2015년 6월 2박3일 일정으로 열린 무궁화회의 모습.

‘태극(太極)72계획’은 6·25전쟁 이후 대한민국 국군이 수립한 최초의 독자적인 전쟁대비계획이고, 무궁화회의(無窮花會議)는 군 장성들이 모여 이 계획을 토의하기 위한 회의 명칭이다. 태극72계획과 무궁화회의는 박정희 대통령이 지시한 자주국방(自主國防)의 일환으로 수립되고 운영됐다. 그런 점에서 태극72계획과 무궁화회의는 우리 국군의 자주국방을 향한 ‘서곡(序曲)’이라고 할 수 있다. 


 
자주국방 향한 대통령의 집념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자주국방을 향한 집념은 대단했다. 1968년 자주국방을 처음 제창한 후, 박 대통령은 이를 위한 일들을 하나씩 추진해 나갔다. 자주국방을 위해 국방조직을 개편 또는 강화하고, 방위산업을 육성하고, 전력증강사업을 추진하고, 그리고 독자적인 전쟁대비계획을 수립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자주국방을 위한 신념은 1971년 신년사에서 확연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신년사는 그해를 “국가안보상 중대한 시련이 예상되는 해라는 점에서 국운을 좌우할 중차대한 시기”로 규정했다. 이에 따라 박 대통령은 “국군을 정예화하고, 향토예비군을 전력화하며, 방위산업을 육성하고, 군 편제를 개편하며, 동원 체제를 정비하고, 장비를 현대화하는 등 자주국방의 필요성이 절실하다”고 역설했다.


미 닉슨독트린 선언…주한미군 감축

그때는 우리나라 국방 환경이 그만큼 위급했다. 1960년대 말부터 북한의 도발과 위협은 더욱 증가하고 있는데, 미국은 닉슨독트린을 선언하면서 주한미군을 감축하고, 국군이 파병돼 싸우고 있는 베트남전선 상황은 ‘자유월남(남베트남)’에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우리의 안보환경에 불리해지고 있었다.

그런 위급한 상황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나라가 살 수 있는 길을 모색했다. 방법은 자주국방뿐이었다. “우리 힘으로 우리나라를 지키는 것”이었다. 박 대통령의 ‘자주국방론’은 “북한이 그들의 동맹국인 중국이나 소련의 지원을 받지 않고 단독으로 남침했을 때, 북한의 침략을 우리의 힘으로 격퇴할 수 있는 국방력을 갖추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북한이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고 남침할 때는 한미동맹으로 대처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제2의 6·25남침’과 같은 민족상잔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국군이 독자적으로 전쟁을 수행할 전쟁대비계획이 필요했다. 그때까지 국군에게는 독자적인 전쟁대비계획이 마련돼 있지 않았다. 박 대통령의 자주국방 선언에 따라 육군본부에서는 황영시(黃永時·24대 육군참모총장) 소장을 위원장으로 하고 17명으로 구성된 ‘전쟁기획위윈회’를 비밀리에 설치한 후, 전략개념을 설정하고 앞으로 이를 발전시킬 상설기구 설치를 건의했다. 그때가 1971년 9월∼1972년 1월 상황이다.

육군본부는 전쟁기획위원회의 건의에 따라 본격적인 ‘한국형 전쟁대비계획’ 수립에 들어갔다. 1972년 2월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에 16명으로 구성된 전쟁기획실(실장 성종호 준장)을 설치하고, 1년간의 연구 끝에 ‘태극72계획’으로 명명된 ‘한국형 방어계획과 반격계획’을 수립했다. 6·25전쟁 이후 국군 단독의 전쟁계획인 셈이다. 태극72계획은 1973년 1월 노재현(盧載鉉) 육군참모총장에게 보고됐다. 노 총장은 보고를 받은 후 “장성급 주요 지휘관 및 참모회의를 소집해 토의를 실시하고, 중지(衆智)를 모아 전역계획(戰役計劃)을 완성하라”고 지시했다.


태극72계획 1973년 1월 육참총장에 보고


육군총장의 지시에 따라 전쟁기획실에서는 장성급 주요 지휘관 및 참모들의 의견을 수렴해 계획을 보완한 후, 1973년 4월 정부 차원의 전쟁대비연습인 을지연습(乙支鍊習) 때 박정희 대통령에게 ‘태극72계획’을 보고했다. 보고를 받은 박 대통령은 “모든 장군들에게 태극72계획을 알리고 의견을 수렴한 후 보완하도록 하라”고 지시하면서 그 토의에는 대통령 자신도 참석하겠다고 했다.

박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우리나라 최초의 독자적 전쟁대비계획인 ‘태극72계획’을 보완하기 위한 토의가 1973년부터 이뤄졌다. 최초에는 육군본부 주관하에 육군의 사단장급 이상 지휘관 및 참모를 대상으로 경남 진해의 육군대학 대강당(통일관)에서 열렸다. 회의 명칭은 보안상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나라 국화(國花)인 무궁화를 차용해 ‘무궁화회의’로 정했다. 육군의 주요 장성급 지휘관이 부대를 비워놓고 한꺼번에 참석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시차를 두고 몇 개 기(期)로 편성해 실시했다. 첫해인 1973년에는 8월 22일부터 10월 12일까지 2박3일 동안 6개 기에 총 91명의 장군들이 참석해 계획을 보완했다.

무궁화회의는 해를 거듭할수록 발전된 모습을 보였다. 1974년부터는 토의 주제의 범위도 확대했다. 육군의 주요 작전계획은 물론이고 군사교리도 토의하게 됐다.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육군의 전 장군으로 확대해 갔다. 그 과정에서 국군통수권자인 박정희 대통령도 이 토의에 참석했다. 그때가 1974년 8월 28일이다. 박 대통령은 1973년 ‘태극72계획’을 보고받을 때 참석하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고, 또 우리 군이 작성한 전쟁대비계획에 대한 장군들의 생각을 듣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때는 박정희 대통령이 무궁화회의에 참석할 상황이 아니었다. 불과 13일 전인 광복절에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의 흉탄에 서거했기 때문이다. 영부인을 잃은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시점임에도 대통령은 승용차 편으로 청와대에서 멀리 떨어진 경남 진해의 육군대학까지 내려왔다. 그날은 장마철 폭우로 날씨까지 좋지 않았는데, 대통령은 그 빗속에 오후 8시쯤 육군대학에 도착했다.

그리고 다음날인 8월 29일에는 육군대학 통일관에서 열린 전체토의에 참가해 ‘태극72계획’ 중 반격계획에 대한 장군들의 열띤 토의를 듣고, 직접 의견도 피력하는 등 자주국방에 대한 강한 의지를 나타냈다. 이후 무궁화회의는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지대한 관심 속에 군의 주요 정책회의로 발전했다.


군 주요 정책회의로 발전


무궁화회의는 최초 육군본부에서 주관했으나, 1984년부터 합동참모본부가 주관했다. 그러면서 육·해·공군의 3군 장성들이 참석하게 됐고, 회의 장소도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진해의 육군대학이 아니라 서울의 육군사관학교로 바뀌었다. 그 결과 무궁화회의는 자주국방을 위한 군의 주요 정책이나 전략문제를 논의하는 ‘3군 장성들의 활발한 토론의 장’으로 발전하게 됐다. 그런 점에서 국군통수권자의 역할은 시대를 막론하고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남정옥 전 군사편찬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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