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국민과 함께 한 국군의 발자취

대한민국 국운 건 대미협상 ‘초강수’ 통했다

유호상

입력 2018. 11. 21   16:09
업데이트 2018. 11. 21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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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이승만 대통령과 한미상호방위조약


국익 위한 지도자의 현명한 결단
휴전 이후 국가 장래 막막함에 답답
‘유엔군서 국군 철수 단독 북진’ 내세워 미국 압박
‘반공포로 석방’ 두번째 계획 상호방위조약 끌어내  

1953년 7월 27일 마크 웨인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이 정전협정에 서명하고 있다. 클라크 장군은 판문점 조인식에 참가하지 않았고, 유엔군 회담 대표가 묵었던 문산 숙소에서 따로 서명했다.
1953년 7월 27일 마크 웨인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이 정전협정에 서명하고 있다. 클라크 장군은 판문점 조인식에 참가하지 않았고, 유엔군 회담 대표가 묵었던 문산 숙소에서 따로 서명했다.

1953년 8월 8일 이승만 대통령이 덜레스 미국 국무장관과 한미상호방위조약에 가조인한 뒤 환담하고 있다.
1953년 8월 8일 이승만 대통령이 덜레스 미국 국무장관과 한미상호방위조약에 가조인한 뒤 환담하고 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6·25전쟁에서 대한민국이 얻은 ‘최대의 성과’였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전적으로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공로였다. 그가 아니었으면 결코 성사될 수 없었다. 그런 점에서 이승만 없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생각할 수도, 존재할 수도 없었다. 이승만은 전후 대한민국이 살아갈 ‘생존의 선물’을 우리 국민에게 안겨 줬다. 한미동맹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휴전협상 과정에서 이뤄졌다. 1951년 6월 23일 유엔 주재 소련 대표 말리크(Jacob Malik)의 휴전 제의에 따라 이뤄진 휴전협상은 대한민국에 위기감을 심어줬다. 북진통일을 열망하던 이승만에게 휴전은 커다란 충격이었다. 전쟁으로 나라가 결딴난 상태에서 나온 휴전 논의에 이승만은 “그것은 대한민국에게 사형집행의 영장이자 자살을 강요하는 행위”라고 항변했다. 38선이든 휴전선이든 다시 분단된 폐허 위에서, 더욱이 군사력으로 강화된 북한의 남침 위협을 그대로 놔둔 상태에서, 단순히 전투행위만 중지하는 휴전은 대한민국에게 죽으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봤다.

그런 데다 미국은 전후 보장책 없이 휴전을 밀어붙였다. 휴전 이후 국가 장래를 생각할 때 이승만은 답답했다. 어떻게든지 활로를 찾아야 했다. 하지만 길이 보이지 않았다. 한국을 배제한 채 진행되는 미국의 휴전협상이 서운함을 넘어 배신행위로 느껴졌다. 나아가 워싱턴의 전쟁수행정책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승만의 판단으로는 미국이 마음만 먹으면 북진통일을 할 수 있는 데도 하지 않았다. 이것은 틀린 생각이 아니었다. 그 당시 유엔군사령관 클라크(Mark W. Clark) 장군은 군사력에 의한 북진통일이 가능할 것으로 여겼다. 이승만도 “북진통일만이 전쟁을 종결 지을 수 있고, 나아가 3차 세계대전을 막을 수 있다”고 역설했다. 그런데 미국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리고 휴전협상에서 한국정부를 철저히 배제했다. 마치 적을 대하듯 한국에 냉담했다.  


1953년 6월 20일 자 조선일보는 이승만 대통령이 단행한 반공포로 석방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1953년 6월 20일 자 조선일보는 이승만 대통령이 단행한 반공포로 석방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미국이 이승만을 힘들게 한 것은 또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북진통일을 이해하고 힘이 됐던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을 유엔군사령관직에서 해임한 것이었다. 맥아더의 퇴진으로 “전쟁에서 승리를 대신할 것이 없다”는 신념도 사라졌다. 전선에서는 ‘이기지도 지지도 말라’는 식의 전투가 진행됐다. 군사적 승리나 북진통일과 전혀 관계없는 38선 부근에서의 고지쟁탈전만 전개됐다. 이승만은 정치적·군사적으로 손발이 잘린 기분이었다. 휴전을 둘러싼 시점에 한국은 국제정치무대에서 외톨박이가 됐다. 유엔도, 한국을 돕기 위해 군대를 파병한 유엔참전국들도 휴전을 갈망하며 휴전을 재촉했다. 계속되는 전쟁으로 자국의 젊은이들이 이국땅에서 피 흘리는 것을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었다. 더욱이 미국은 한국에 대한 전후 보장책 없이 휴전만을 서둘렀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이승만은 전후 대한민국이 살아갈 방도를 모색했다. 그것은 미국과의 동맹을 뜻하는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뿐이었다. 이승만은 이를 성사시켜야만 했다. 그런데 미국은 어떻게 해서든지 한국과 동맹을 맺지 않으려고 했다. 평소 이승만은 “한국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우방국은 미국”이라고 여겼다. 나아가 “공산주의라는 사막에서 미국은 자유민주주의의 오아시스(oasis) 역할을 해야 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런 미국이 휴전을 빌미 삼아 한국이 가장 필요할 때 버리려고 했다. 이승만은 크게 낙담했다.

이승만으로서는 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미국을 다룰 해법을 찾았다. 두 가지였다. 먼저 유엔군으로부터 국군을 철수시켜 단독 북진하는 문제를 고려했다. 미국의 위신과 자존심을 상하게 할 작정이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대한민국의 국력과 군사력으로는 북진통일은 고사하고 군대 유지도 어려울 때였다. 모든 것이 미군의 지원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승만은 그렇게 하겠다고 미국을 계속 압박했다.

미국은 한국이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라고 믿었지만 어디로 튈지 모를 이승만의 초강수 정치 행보에 내심 긴장했다. 유엔군사령부는 이에 대한 대책으로 이승만을 제거할 ‘에버레디 계획(Everready Plan)’을 수립했다. 하지만 미국은 “한국에 이승만을 대신할 반공지도자가 없다”고 판단하고 이를 철회했다. 이승만도 유엔군에서 국군을 철수시키는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이승만은 두 번째 계획에 착수했다. 그것은 반공포로 석방이었다. 당시 미국은 한국 정부의 반공포로 석방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미국의 그런 처사에 이승만은 격분했다. 워싱턴에서는 그런 이승만을 달래려고 브리그스(Ellis O. Briggs) 주한미국 대사와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을 경무대로 보내 “정전협정 체결에 협력하면 정치적·경제적·군사적 지원을 보장하겠다”고 했다. 이제 미국을 믿지 못하게 된 이승만은 “당신들은 모든 유엔군을 철수시킬 수 있다. 이제 우리의 운명은 우리가 결정한다. 누구에게 싸워달라고도 하지 않겠다. 처음부터 민주주의가 우리를 도울 것이라고 의존한 것이 실수다. 이제 아이젠하워 정부에 협력한다는 보장을 할 수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그러고서 이승만은 휴전협상에 찬물을 끼얹게 될 반공포로 석방을 단행했다. 1953년 6월 18일의 일이다. 워싱턴과 국제사회가 발칵 뒤집혔다. 미국은 “등 뒤에 칼을 꽂는 배신 행위”라고 했고, 공산군 측은 “휴전 후 미국은 한국을 통제할 수 있는가?”라며 볼멘소리를 했다. 유엔참전 우방국들도 이승만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이승만은 “다소 늦었지만 해야 할 일을 했다”며 느긋했다. 상황이 바뀌었다. 휴전을 하려면 앞으로 또 어떤 돌출행동을 할지 모를 이승만을 달래야 했다. 급기야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이 서울로 특사를 급파했다. 이승만과 미국 대통령 특사는 경무대에서 20일간 국익을 놓고 치열한 외교전을 치렀다. 결과는 이승만의 완승이었다. 한국은 휴전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미국과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에 합의했다.

그렇게 해서 1953년 10월 1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됐다. 한미동맹의 시작이었다. 그로부터 65년의 세월이 흘렀다.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바탕을 둔 한미동맹은 이승만의 예언처럼 대한민국의 생존을 보장했다. 나아가 대한민국을 경제적으로 번영되게 했다. 그 과정에서 이승만은 대한민국을 하찮은 존재가 아닌 미국과 동등한 자격을 지닌 협력국 내지는 동맹국으로서 대우할 것을 미국에 당당히 요구해 관철했다. 이승만은 전후 대한민국의 생존을 놓고 벌인 투쟁에서 마침내 승리했다. 국가 최대의 위기에서 오로지 국익을 위해 발휘한 국가지도자의 현명한 결단이 아닐 수 없다.

<남정옥 전 군사편찬연구소 연구위원>

유호상 기자 < hosang61@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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