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정호영의 역사소설 광해와 이순신

광해, 조선의 임금이 되다

정호영

입력 2018. 11. 20   13:14
업데이트 2018. 11. 20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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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장 개혁군주 광해의 부침 (212회)


유성룡이 세상을 떠난 직후부터 광해에게 다시 사람이 몰리기 시작했다. 유성룡을 탄핵했던 북인의 일파인 대북이 거꾸로 광해를 지지하는 데 앞장섰다. 북인 중에서도 광해의 정통성을 높이 평가한 자들이 대북이고, 선조의 뜻을 추종하는 자들은 소북으로 불렸다. 대북의 대표적인 인물이 강직한 대학자이자 전란 시 의병장이었던 정인홍이었다.

정인홍은 광해를 견제한 조정의 실세인 소북의 유영경을 처단하라고 탄핵 상소를 올렸다. 임금인 선조에게 협박과 다름없는 무시무시한 내용이었다. 평소 충신은 죽이고 간신만 끼고돈 임금에 대한 불만이 고스란히 담긴 상소였다.

“전하는 유영경 때문에 고립되어 개미 새끼 하나 의지할 곳이 없고, 장차 어진 아들을 보호하지 못하고 죽어서도 후회할 것입니다.”

임금인 선조와 영의정인 유영경은 정인홍의 상소에 경악했다. 병석에 누워 있던 선조는 유영경에게 힘을 실어주며 정인홍을 반역자로 규정했다. 이어 정인홍을 비롯해 이이첨 등 광해를 지지하는 세력 모두를 귀양 보냈다.

광해는 졸지에 중간에서 난감한 처지가 됐다. 선조는 정인홍의 상소가 있은 직후부터 문안을 오는 광해를 문전박대했다. 광해로서는 또 한 번의 위기였다. 광해는 컴컴한 미로를 헤매야 하는 암담함에 피눈물을 흘렸다.



1608년 2월 1일, 조선의 임금인 선조가 세상을 떠났다. 59세의 나이였다.

선조가 죽자 중전인 인목대비가 왕실의 최고 어른이 됐다. 인목대비는 다음 날 주위의 예상을 깨고 세자 광해를 임금으로 즉위시켰다.

광해는 2월 2일 정릉동 행궁(덕수궁)의 서청에서 즉위식을 치르고 용상에 올랐다. 왕세자가 된 지 16년 만에 조선의 지존이 된 것이었다.

광해는 선조가 죽던 날, 인목대비를 은밀히 만났다. 유약했던 세자 광해는 이날 난생처음으로 결단을 갖고 거래를 시도했다. 슬픔에 젖어 있던 인목대비에게 광해는 짧은 한마디 약속의 말을 던졌다. 당시 궁중의 움직임을 잘 알고 있었던 상궁 김개시의 조언에 따른 것이었다.

“대비마마, 영창대군이 아무 탈 없이 성장할 수 있도록 책임지겠습니다.”

인목대비는 자신보다 아홉 살이나 위인 세자 광해와 맞설 자신이 없었다. 세 살밖에 안 된 어린 아들을 보위에 올리는 위험을 감수하기보다는 차라리 보호받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광해의 이러한 결단은 결국 선조가 서거한 지 하루 만에 보위에 오르는 결과가 됐다.

광해는 즉위하자마자 탁월한 능력으로 나라를 안정시켰다. 전란 중 백성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그들의 삶과 고통을 깊이 이해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피폐해진 민생을 어루만지고 무너져버린 국가의 기반을 재건하기 위해 의욕적으로 달려들었다.

정호영 기자 < fighter7@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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