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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MS급 소해정 (上)

윤병노 기사입력 2018. 05. 02   19:45 최종수정 2018. 11. 20   13:04

JMS, 다목적 연안 보조정으로 ‘몽금포작전’ 맹활약

日 해군 2차 세계대전 중  운용 건조...주기능은 예인, 기뢰 부설·수거용

한국 해군 11척 인수,  성능 부족했지만 창군 초기 유용하게 활용

 


LCI급 상륙정의 첫 인수가 이뤄진 뒤 조선해안경비대는 1946년 10월 9일 일본 해군이 사용했던 소해정(JMS:Japanese Minesweeping Ship) 4척(대전정·통영정·대구정·태백산정)을 인수했다.

턱없이 성능 부족한 함정

이어 조선해안경비대 미 군사고문관이던 길(Samuel Guill) 소령은 JMS의 추가 장비와 수리부속품을 획득하기 위해 11월 중순 일본 도쿄로 건너갔다. 그러나 현지에는 사용 가능한 장비가 없었고, 수리부속품도 일부만 구할 수 있었다.

길 소령은 한국에 인도한 것과 동일한 JMS 12척을 발견하고, 현지 미군 관계자와 협의해 이 중 7척을 한국에 인도하기로 약속받았다. 이에 따라 조선해안경비대는 정비가 먼저 완료된 JMS 2척(두만강정·통천정)을 12월 23일 추가 인수했으며, 이듬해에 나머지 5척(단양정·단천정·토성정·대동강정·덕천정)을 인수했다.

JMS급 함정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 해군에서 운용할 목적으로 1939~1944년 사이 건조된 함정이다. 국내에서는 소해정으로 불렀지만 일본 해군에서는 ‘부설정형 예선(敷設艇型 曳船)’으로 분류했다. 주 기능은 예인이었고, 기뢰 부설 기능을 갖췄다. 일본은 JMS급을 선박예인, 기뢰부설·수거, 소해 등 다용도로 운용했다.

JMS는 소해전에 특화된 선박이 아닌 다목적 연안 보조정이었다. 이에 따라 한국 해군의 주력함으로 운용하기에는 성능이 부족했다. 그럼에도 우리 해군은 함정이 부족한 창군 초기에 JMS급을 유용하게 활용했다.



“정신 빼앗기지 말고 기술만 배우자”

초기 인수한 JMS급 4척에는 함정마다 일본인 승조원 20여 명이 타고 있었다. 당시 손원일 총사령관이 조선해안경비대 인수 승조원들의 함정 장비운용 교육훈련을 위해 미 수석고문관 맥케이브 대령과 합의해 일본 승조원을 1개월간 잔류시킨 것이다.

그러나 광복 이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기에 조선해안경비대 인수 요원들에게는 일본에 대한 증오심이 남아 있었다.

이에 교육훈련은 미묘한 감정과 분위기 속에서 이뤄졌다. 일부 대원들은 함정 인수가 늦어지더라도 일본인에게는 배우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승조원들은 해군 발전을 위해 기본적인 기술은 습득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사병들은 일인(日人)에게도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으니, 일인에게서라도 정신만 빼앗기지 말고 기술만 배우면 그만 아니냐는 것이었다.”(해군일화집 1권 중)


전투배치 중인 JMS-304 태백산정과 포 요원들.


국군 최초 응징·보복작전서 큰 전과

JMS급 함정은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하던 육군 제14연대의 남로당계 장병들이 북한 공산세력의 지령에 따라 일으킨 ‘여수·순천사건’을 진압하는 작전에 투입돼 큰 공적을 세웠다.

특히 JMS급 함정은 국군 최초의 응징·보복작전이었던 ‘몽금포작전’에서 맹활약을 펼쳤다. 몽금포작전은 광복 이후 혼란한 시기에 북한이 아군 함정 3척과 미 군사고문단장 전용 보트를 납북하자 우리 해군이 이에 응징·보복하기 위해 계획한 작전이다.

우리 해군은 이승만 대통령과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의 승인을 받아 작전계획을 세웠다. 1949년 정부 수립 1주년 기념일을 맞아 첫 관함식을 거행하는 8월 16일을 작전 개시일로 잡았다. 통영정 등 JMS급 4척을 포함한 함정 6척과 특공대 20명으로 구성된 작전부대는 1949년 8월 16일 인천항을 출발했다. 다음날 새벽 북한 몽금포항에 도착한 이들은 기습작전에 돌입했다.

JMS급 통영정은 고무보트로 침투하는 아군의 특공대원들을 엄호했다. 통영정은 특공대장 함명수(전 해군참모총장·중장 예편·2016년 작고) 소령이 항내로 진입하다 적의 총탄에 중상을 입자 충무공정으로 긴급 이송했다. 이어 몽금포 항내로 진입해 37㎜ 포와 중기관총으로 부두에 계류 중이던 북한 함정 4척을 격침·대파했다.

통영정 승조원들은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적 함정에 수류탄을 투척한 후 올라타 육탄전을 감행했다. 이를 통해 적 승조원 5명(장교 1명, 사병 4명)을 생포하고, 함정을 나포하는 대전과를 올렸다.
 글  =  윤병노 기자

사진 = 해군본부

전문가 해설 ---------------------- 

   임성채 해군역사기록관리단 군사편찬과장

 

이승만 대통령, 해군 소해정 戰果 극찬

6·25전쟁 발발 이전 전투함 구매 계기 마련


정부 수립을 전후한 시기에 남로당의 지령을 받은 세력들이 군대에 들어와 반란·폭동·납북 등을 획책했다. 이들은 함정에도 승선해 승조원들을 선동하고, 함정을 납북하거나 납북을 기도하다 발각되기도 했다.

 

1949년 5월에는 국군 2개 대대가 대대장에 의해 월북한 사건도 발생했다. 당시 함정 간부들은 출동 중 좌익 승조원에 의한 함상 반란에 대비해 권총을 차고 잠을 자는 등 매일이 긴장의 연속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납북·월북 사건으로 국군의 지휘체계가 흔들렸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을 응징한 몽금포작전 결과를 보고받은 이승만 대통령은 매우 고무됐다. 속력이 느리고 노후된 소해정으로 큰 성과를 거둔 해군의 용맹을 극찬하며 격려했다.

 

이후 이 대통령은 해군이 전투함을 구매하기 위해 성금을 모금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는 속력이 빠르고, 화력이 강한 전투함 몇 척을 더 구입하라면서 당시로는 큰 액수인 4만5000달러를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에게 줬다.

이에 해군은 PC-701함(백두산)을 포함한 전투함 4척을 구매함으로써 6·25전쟁 발발 이전 북한 해군력과 대등하거나 우위에 서게 됐다.

 


  임성채 < 해군역사기록관리단 군사편찬과장 >


 

윤병노 기자 < trylover@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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