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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이슬람 전방위 만남 ‘아픔보단 문화 체험’

입력 2018. 01. 31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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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슬람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


이슬람 역사, ‘서구와의 갈등’ 시각은 소수

기독교인에 관용 베푼 살라딘 장군

이슬람보다 오히려 유럽서 칭송 받아

 

 


유럽과 이슬람 세계의 관계와 상호 영향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사건을 들라면 의심의 여지 없이 십자군 전쟁일 것이다. 알 카에다의 우두머리 오사마 빈 라덴이 서구를 향한 테러를 십자군 전쟁에 대한 복수로 포장하는가 하면, 2003년 3월 미국의 부시 전 대통령이 이라크와의 전쟁을 ‘십자군 전쟁’ 운운하다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그만큼 십자군 전쟁은 두 세계를 갈라놓은 역사적 사건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슬람 역사에서 십자군에 대한 아픈 기억은 그리 크지 않다. 이슬람 세계가 받은 충격이 미미할 뿐만 아니라 십자군 전쟁을 통해 오히려 유럽이 앞선 이슬람 문화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십자군 전쟁, 다양한 평가 봇물 이뤄

셀주크 튀르크의 이슬람 세력이 예루살렘을 지배하면서 기독교인들의 성지순례를 방해하자 기독교 유럽 세계가 예루살렘을 되찾기 위해 일으킨 전쟁을 십자군 전쟁이라 한다. 1099년부터 200여 년에 걸쳐 9차례의 큰 전쟁을 치렀다. 요즘은 십자군 전쟁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과 다양한 평가가 봇물을 이루고 있다. 신앙적 열정으로 참여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겠지만, 로마 교황청이 십자군을 이용해 내전 중인 세속 군주들을 제압하고 1054년 동서교회 분열로 이단 지역이 돼 버린 동로마제국을 누를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하고자 했다는 주장도 강하다. 특히 1차 십자군의 경우 유달리 부랑자, 가난한 사람들이 ‘면벌부’를 받기 위해 많이 참여하기도 했다.

한편 이슬람 세계에서 이 전쟁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역사적 평가는 사뭇 다르다. 우선 이슬람 역사에서는 십자군 전쟁을 크게 다루지 않고, 더욱이 이를 서구와의 갈등으로 보는 시각은 소수다. 그들은 이 전쟁을 인류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살육전쟁이고 서구의 야만성을 드러낸 추악한 역사로 기억하고 이해한다. 그도 그럴 것이 십자군의 이름으로 자행된 9차례의 전쟁 중 그나마 빼앗긴 성지 탈환을 내걸고 예루살렘으로 향했던 것은 1차 전쟁 정도이고, 나머지 8차례 전쟁은 주로 동방기독교나 비잔틴 세계를 겨냥한 침략과 약탈이 주가 됐기 때문이다.



추잡한 행동과 학살…비잔틴 제국 피폐

1099년 1차 십자군 전쟁도 신의 이름을 내건 성전과는 거리가 멀었다. 예루살렘을 점령한 십자군들은 무슬림과 유대인을 닥치는 대로 학살했다. 사람들이 가장 비종교적인 방식으로 살육당했고, 심지어는 부녀자들까지 죽여 피의 성전이 된 예루살렘 성안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없었다. 인류역사상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된 가장 잔인하고 섬뜩한 만행이었다. 2차 전쟁부터는 다른 주변 국가들을 약탈의 대상으로 삼았다. 특히 4차 전쟁 때는 부유한 비잔틴 제국을 공격해 콘스탄티노플을 초토화했다. 성당과 가옥을 불태우고, 동방 기독교의 심장인 성 소피아 성당을 공격해 쓰레기장으로 만들어 버렸다. 온갖 추잡한 행동과 학살, 철저한 약탈과 파괴로 비잔틴 제국은 다시 회복하기 힘들 정도로 피폐해졌다.

 

알 카에다의 수장 오사마 빈 라덴

 


결국 1453년 이교도인 오스만 튀르크의 공격으로 동로마(비잔틴)제국이 힘없이 무너지는 계기가 됐다. 무엇보다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 함락 직전, 교황청과 유럽 국가들로부터 군대 파병 제의가 왔을 때, 비잔틴 제국 시민들은 차라리 이교도의 터번에 무릎을 꿇을지언정 로마 가톨릭의 지배는 받아들이지 않겠다며 원병 요청을 거절했다. 그러고 스스로 패망의 길을 택한 것도 1204년 4차 십자군 전쟁의 악몽이 너무나 선연했기 때문이었다.

1차 예루살렘 정복 이후 188년이 지난 1187년에는 오히려 아랍의 장군 살라딘에 의해 예루살렘이 다시 이슬람 군대의 지배를 받게 됐다. 1차 전쟁 때의 참혹한 학살을 기억하는 예루살렘의 기독교인들은 목숨을 포기했다. 그러나 예루살렘으로 진격한 살라딘 장군은 성안의 민간인들을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살려두었다.

원하는 기독교인들은 일정한 세금을 내는 조건으로 자신의 재산을 갖고 성 밖으로 자유로이 빠져나갈 수도 있었다.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관용이었다. 살라딘 장군이 오늘날 이슬람 세계보다는 오히려 유럽 기독교 세계에서 존경받고 성인의 반열에 올라 칭송의 대상이 되는 배경이다.

당시 살라딘의 행위는 이슬람 전쟁 방식으로 보면 지극히 당연한 수칙이었기 때문에 사실 이슬람 세계에서 살라딘이란 존재는 서구만큼 크게 부각되지 못했다. 참으로 재미있는 역설이다.



공중 목욕탕·카페 문화 등 유입

살라딘 장군의 초상화

 


십자군 전쟁이 인류 역사에 공헌한 것은 유럽 대중과 무슬림, 서구와 이슬람 세계가 전방위적으로 만나면서 서구가 이슬람의 선진 문화에 크게 자극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때 향료, 진귀한 상품, 오렌지, 레몬, 커피, 설탕, 면화와 그 재배법, 직물 등이 물밀 듯이 유럽으로 들어갔다. 아라베스크 문양도 이때 유럽에 들어갔다. 이슬람 건축양식과 기술도 15세기까지 유럽의 건축과 예술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튀니지와 모로코에서 건너간 이슬람 건축은 스페인의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무데하르 양식으로 발전하고, 그것이 유럽의 고딕 양식으로 이어졌다. 공중목욕탕 문화인 하맘도 새로운 사교 공간으로서 중세 유럽을 강타했다. 이슬람 세계에서 출발한 커피 문화도 그렇다. ‘카와’라는 아랍어 단어에서 커피라는 이름이 나왔고, 이스탄불 궁정의 커피 문화가 유럽에 전해져서 오늘날 카페 문화가 뿌리를 내렸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전쟁은 당사자 모두에게 아픈 기억과 트라우마를 남기지만 십자군 전쟁이 그랬던 것처럼 서로 다른 문화가 접촉하고 첨단지식과 선진기술이 전해짐으로써 인류사회의 성숙에 기여하는 측면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전쟁보다는 상호존중의 교류와 열린 용광로 같은 융화만이 진정한 인류사회의 성숙에 기여할 수 있다는 대원칙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감수=국군기무사령부

<이희수 한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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