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테러리즘과 국가안보

수백년간 고통과 모멸… 종교·문화적 열등감에 반발

입력 2018. 01. 17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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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슬람은 왜 그렇게 서구를 증오할까?




이슬람 세력은 거의 1000년(711∼1683) 동안 유럽 지배

영광과 환희, 자존의 시대 만끽… 르네상스 일으킨 원동력

비엔나 전투 패배 후 하향세, 서구가 지배 시작 ‘전세 역전’



21세기 들어 인류사회는 테러를 일상으로 달고 살아가고 있다. ‘알 카에다’가 10여 년 동안 지구촌 곳곳에서 끔찍한 테러를 일으키더니, 이제는 ‘ISIS’라는 또 다른 괴물이 지난 3년간 수천 건의 잔혹한 테러를 저질러왔다. 모두가 이슬람원리주의를 표방하는 단체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서구를 향한 극단적 분노를 갖고 복수를 꿈꾸는 세력들이 이슬람 세계에 단단한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방증이다. 왜 이슬람권에서 테러 조직이 빈번하게 자생하고 그토록 잔혹한 방식으로 서구사회에 저항하는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더 심층적인 역사적 이해가 필요하다.






1200년간의 ‘지배-피지배’ 아픈 역사

이슬람 세계와 서구 사이에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깊은 갈등과 치유되기 어려운 역사적 트라우마가 존재한다. 이러한 역사에 대한 이해 없이 오늘날 서구와 이슬람 세계가 충돌하고 사사건건 부딪치는 이유를 제대로 파악하기는 매우 어렵다. 두 세계는 적어도 1200년이라는 ‘지배-피지배’의 아픈 기억을 갖고 있다. 이슬람 세력은 거의 1000년(711∼1683) 동안 유럽을 지배하면서 영광과 환희, 무엇보다 자존의 시대를 만끽했다. 당시 이슬람은 승리의 종교였으며, 야만을 깨우치는 문명이었으며, 모두가 우러르고 배우려는 선진문화였다.

이슬람이 처음 유럽 땅을 차지한 것은 711년이다. 그해 아랍 장군 타리크 이븐 지야드(Tariq ibn Ziyad)는 자신의 이름을 딴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이베리아 반도(오늘날 스페인과 포르투갈)를 침공했고, 732년에는 프랑스 파리 교외의 투르와 푸아티에까지 진격했다.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인 유럽을 구한 것은 프랑크 왕국의 궁재 카를 마르텔(Charles Martel)이었다. 그는 유럽연합군을 결성해 치열한 전투 끝에 이슬람의 북상을 저지했다. 그렇지만 이베리아 반도 대부분은 1492년 이사벨라(Isabella) 여왕이 이 땅을 되찾을 때까지 거의 800년간 이슬람의 영토가 됐다.

지중해에서도 이슬람의 팽창이 계속됐다. 프랑스 남부와 이탈리아의 시칠리아를 포함해 지중해는 거의 200년 이상 이슬람의 바다가 됐다. 그래서 14세기 아랍 역사학자 이븐 할둔(Ibn Khaldoun)은 “지중해는 유럽인들이 배 한 척 띄울 수 없는 이슬람의 바다가 됐다”라고 호언할 정도였다. 이 시기 이슬람이 지배한 이베리아 반도는 중세 세계 최고 수준의 문명 절정기를 누렸으며, 톨레도의 번역아카데미를 중심으로 과학·예술·문화 관련 저술들을 라틴어로 번역해 유럽에 전해 줌으로써 유럽 르네상스가 일어나는 단단한 지식 원동력이 됐다.

바그다드와 코르도바에서 동시에 꽃핀 중세 이슬람이 승승장구한 것만은 아니었다. 돌연 칭기즈칸이라는 새로운 세계정복자가 등장해 1258년 바그다드를 함락시키고 아랍제국을 무너뜨렸다. 그러나 중동의 몽골제국은 반세기 만에 사라지고, 이번에는 아랍이 아닌 투르크인들이 오스만 제국을 세우고 이슬람세계를 통일했다.

북아프리카 모로코까지 점령한 오스만 제국은 파죽지세로 유럽 영토로 진격해서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고 비잔틴제국을 멸망시켰다. 이로써 발칸반도가 이슬람화됐는데 더욱이 1683년경에는 당시 유럽 최강국이었던 합스부르크가의 심장부 비엔나가 세 차례나 공격받았다. 유럽 심장부가 이슬람에 점령당할 두 번째 위기였다. 


유럽 진출 711년… 이베리아 반도 점령

다행히 오스만 군대가 난공불락의 비엔나 점령에 실패함으로써 유럽은 살아남았지만, 지브롤터가 뚫리는 711년부터 비엔나가 공격당하는 1683년까지 거의 1000년간 유럽은 이슬람 세계를 이기지 못했다. 기독교 유럽 세계가 이교도 이슬람으로부터 1000년간 지배당하고 위협의 공포에 떨었다는 사실은 쉽게 떨쳐버리기 힘든 앙금으로 남아 있다. 그것이 오늘날 유럽이 이슬람 세계에 대해 갖고 있는 이슬람포비아(이슬람 혐오증)의 역사적 배경이다.

한편 이슬람 세계가 유럽의 약진에 두려움을 느낀 적도 더러 있었다. 첫째는 1099년 1차 십자군 전쟁이었다. 이슬람 왕조가 지배하고 있던 예루살렘이 기독교 십자군에게 점령당하면서 성 안에 있던 모든 이슬람인들과 유대인들은 잔혹하게 몰살당했다. 승리는 항상 이슬람의 편이라는 절대신념이 처음으로 금 간 사건이었다. 이슬람 세계가 맛본 최초의 패배였던 만큼 그 충격도 컸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에 대한 트라우마는 오래가지 않았다. 이어진 7차례의 십자군 전쟁은 이슬람과는 상관없는 약탈전쟁으로 돌변했고 심지어 기독교 세계끼리의 다툼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1187년 아랍 장군 살라딘이 다시 예루살렘을 정복해 관용정책을 펼침으로써 유럽 세계에 대한 이슬람 세계의 확실한 우위를 다시 한번 보여줬다.

그러나 1571년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 함대가 유럽함대에 침몰당하자 약간의 두려움이 확산됐고, 1683년 믿었던 비엔나 공성 전투에서 끝내 오스만 제국이 합스부르크가를 꺾지 못하자 희망이 좌절로 바뀌기 시작했다.

비엔나 전투 실패는 유럽을 향한 이슬람의 팽창이 정점을 찍고 내리막길로 돌아서는 역사적 전환점이 됐다. 그 후 100년간은 힘의 균형추가 이슬람 세계에서 서구로 다시 넘어가는 조용한 냉전의 시기였다. 드디어 1798년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침공하면서 전세는 완전히 뒤바뀌었다. 이제 이슬람 세계가 본격적으로 서구의 지배를 받기 시작한 것이다.


‘역사적 갑질’에 대한 혹독한 대가

이는 동남아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세계 최대 이슬람 국가인 인도네시아가 1602년부터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았고, 이슬람 왕국인 인도 무굴제국이나 말레이시아 등도 18세기 후반 영국의 식민지가 됐다.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20세기 중반까지 200여 년 동안 모든 이슬람 세계가 단 한 지역의 예외도 없이 서구의 지배를 받게 됐다. 1000년간 모욕과 모멸감에 떨었던 유럽이 거꾸로 이슬람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을 때 그들의 약탈, 고문, 인종청소는 표현이 불가능하게 할 정도로 가혹했다. 무슬림들은 무시하고 낮춰보았던 유럽으로부터 도리어 지배당하는 왜곡된 현실을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유럽의 피식민 지배를 경험하면서 지난 1000년간의 역사적 갑질에 대한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이슬람 세계의 상징적 구심체였던 오스만 제국마저 1차 대전 당시 독일 중심의 동맹국에 가담해 패전국이 되면서 이슬람 세계는 산산조각이 났다. 



1차 대전 후 이슬람 세계 산산조각


이슬람 세계는 이제 57개 개별국가로 독립을 쟁취했다. 하지만 최근 수백 년간 고통당하고 모멸당하면서 종교적·문화적 열등감에 시달려 왔던 기억이 아직은 생생하다. 물론 대부분의 국가들은 약자의 현실을 수긍하고 서구와 협력하고 공존하는 실용주의로 돌아섰지만, 서구의 이중잣대와 계속되는 침략 행위에 일부 급진주의자들은 행동으로 반발하기 시작했다.

이집트의 급진 사상가 하산 반나(Hasan al-Banna)와 사이드 쿠틉(Sayyid Qutb)에서 출발한 이슬람원리주의 이념 집단들은 무슬림형제단처럼 집권 단계까지 진화한 반면, 일부는 ‘알 카에다’와 ‘ISIS’ 같은 무장투쟁 조직으로 변신해 글로벌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 테러조직들은 결코 성공할 수 없지만, 그들의 응어리와 목표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면 적절한 테러 대처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희수 한양대 교수>

감수=국군기무사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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