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잊혀진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재판도 없이 총살 억울한데 묘비도 묘도 없어…

입력 2017. 12. 19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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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일본의 총탄에 순국한 최재형


왕바실재 언덕 최재형 순국 추정 지역.  필자 제공
왕바실재 언덕 최재형 순국 추정 지역. 필자 제공



11명 자녀 석달 동안 검은 옷 입어

넷째 딸 소피아 아버지께 쓴 편지

조국 잃은 국민의 원한으로 절절…



일본은 4월 7일 투옥된 최재형을 이송하던 중 감옥에서 가까운 왕바실재 언덕에서 재판도 없이 총살했다. 박환 교수의 『시베리아 한인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에 나오는 최재형의 사망에 대한 일본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니코리스크 파견 족립포병대위의 보고에 의하면 같은 지역에서 우리 헌병은 수비보병대와 협력해 4월 5일, 6일, 양일에 걸쳐서 그 지역의 배일선인(일본에 반대하는 조선인)의 가택수색을 행하고, 최재형 이하 76명을 체포했다. 최재형과 김이직, 황경섭, 엄주필 등 4명은 유력한 배일선인으로서 특히 최재형은 원래 상하이 임시정부의 재무총장이었고 니코리스크 부시장의 위치에 있는 것을 기화로 다른 3명과 모의해 혁명군 원조의 주모자가 되고 배일선인을 선동하고 아군을 습격하는 등 무기를 가지고 반항적 행동을 하는 것으로 판단돼 4명을 취조했다. 다른 사람들은 특히 잡아둘 근거가 없고 유력자도 아니어서 장래를 엄히 경계해 석방했다. 그러다 우연히 같은 지역에 주둔한 헤이룽 헌병대본부와 니코리스크 헌병분대가 4월 7일 청사 이전을 하게 돼 같은 날 오후 6시쯤 4명 전원을 신청사로 호송하던 중 이들이 틈을 엿보아 도주해 헌병이 추적 체포하려 하였으나, 그들이 지역을 잘 알고 있어서 교묘히 도망하기에 사살했다.’

1920년 5월 7일 자 동아일보에 실린 최재형의 순국 기사는 아래와 같다.

‘일본을 배척하는 조선사람의 부락인 신한촌이 일본 군사에게 점령돼, 그곳에서 달아난 조선인들은 니코리스크로 가서 그곳에 있는 조선 사람과 함께 불온한 조직이 되었으므로 일본 군사는 헌병과 협력하여 수일 전에 조선사람의 근거지를 습격하고 원 상하이 임시정부 재무총장으로 작년 10월에 니코리스크에 와 있던 최재형 일명 최시형 이하 70명을 체포하여 취조한 결과, 다른 사람은 다 방송시키고, 두목인 최재형 등 4명은 총살하였다더라.’

한편 독립신문에도 최재형 추도 기사가 실렸다. 최재형은 11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자녀들은 최재형이 사망한 후, 석 달 동안 검은 옷을 입었고 최재형의 부인 김 엘레나 페트로브나는 1년간 검은 옷을 입었다고 한다.

그 당시 블라디보스토크 일본 총영사관에서 조선인들을 담당했던 사람은 기토였다. 그는 많은 밀정을 거느리고 연해주 한인사회를 분열시켰는데, 최재형의 넷째 딸 소피아가 사망한 아버지 최재형에게 쓴 편지도 소피아 몰래 필사해서 현재 일본외무성 사료관에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그 편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순국 추정지에서 거행한 추도식.
순국 추정지에서 거행한 추도식.


경애하는 폐차!

참기 힘든 정을 억누르다 벌써 8월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더 참기 힘듭니다.

아버님께서는 낮이나 밤이나 저승에서

애비 죽인 놈은 살아서 활개를 치고 있는데

왜 원수를 갚지 못하느냐고 울고 계실 것만 같습니다.



악마 같은 기토야!

사람 탈을 쓴 기토야!

너는 어찌하여 우리 아버지를 죽였느냐.

어떤 일이 있어도 네 죄는 용서할 수 없다.

네가 제 나라를 지킨다는 것이 지나쳐 불쌍한 조선 사람만 죽이고 있는 것이다.



이제 네 나라도 너를 못 지켜주게 되었다.

네가 좋아하는 조선사람 죽이는 일도 마지막을 고한다.

네가 우리 동포를 지배하는 일도 끝이 난다.

네가 이 세상에서 더 살 수 있는 것도 막을 내린다.



기토야!

너 죽고 나 죽자!

너 죽인 뒤에 나도 세상을 떠난다.

사람이 두 번 죽은 것 보았느냐.

사람 목숨은 한 번밖에 없는 생명이다.



사랑하는 아버님!

당신의 딸을 잊지 마세요.

당신의 열녀는 이제 아버지의 원수를 갚습니다.

잊지 마소서!



한편 최재형의 아들 발렌친 페트로비치는 아버지 최재형의 인간적인 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최재형은 위대한 인도주의자였다. 이는 아버지의 모든 행위와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나타나고 있다. 가족 모두를 사랑으로 대했다. 결코 아이들에게 육체적으로 강제하지 않았으며 말로 질책하는 것에 그쳤다. 가족 간에는 큰소리나 성을 내는 일이 없었다.’

최재형의 큰아들 최운학(최 표트르 페트로비치)은 포시에트 얀치혜에서 출생해 교구 소속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학교교원으로 있다가, 1915년에 징집돼 독일과의 전투에 참가했다. 1918년 시베리아 동부전선에서 백위파와 전투하던 중 중상을 입고 이르쿠츠크 병원에서 전사했다. 특히 최운학은 안중근 장군의 동생인 안정근과 친한 친구였다.

둘째 아들 최성학(최 파벨 페트로브나)은 독립운동을 하다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푸룬제 군사학교에 들어가 아무르함대 지휘관으로 임명됐으나 부친인 최재형이 부르주아였던 점을 은폐했다는 이유로 제명됐고 일본간첩이라고 자인할 것을 강요당하다 1938년 처형당했다.

최재형의 남은 가족들은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으로 뿔뿔이 흩어져 불행한 삶을 살아야 했다.

참고서적: 박환 저 『시베리아 한인민족운동의 대부 최재형』, 문영숙 저 『독립운동가 최재형』


<문영숙 작가·안중근 홍보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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