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소녀가 아닌 엄마의 삶
‘한국의 미’ 행사 2시간 가량 진행하며
사연 있는 현지인들 많이 만나
그중 기억에 남는 사람이 엘리사
육아 스트레스 해소 위해
한국 드라마 보다가 더 잘 이해하려
한글·한국 문화 공부해
엘바와 아침부터 격한 인사를 끝낸 나는 오늘 날씨를 확인하기 위해 창문으로 향했다. 요 며칠간 계속 비가 내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햇빛이 쨍쨍했다. 오랜만에 ‘한글의 미’ 행사를 진행하기 위해 집을 나선 나는 테아트로 광장으로 향했다. 행사를 시작한 후 많은 사람이 다녀갔다. 그중 기억에 남는 사람이 엘리사였다. 아이를 데리고 온 엘리사는 고등학생처럼 앳돼 보였다. 그녀는 남미에 많다던 미혼모였다. 평소 육아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한국 드라마를 자주 본다는 엘리사는 나에게 겨울연가 주인공인 배용준 씨 이름을 써달라고 했다. 완성된 작품을 받은 그녀는 행복한 미소를 지었고, 그 미소는 나를 따뜻하게 만들었다. 길거리에서 행사를 하면서 들은 그들의 이야기는 나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했다.
엘바와의 아침 인사
요 며칠간 계속 비가 내려 방구석에만 있었던 나는 찌뿌듯한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갔다.
그곳에는 엘바가 있었다. 엘바는 나를 보자마자 칼싸움 흉내를 내면서 나를 공격했다. 나는 쓰러진 척 연기를 했고, 한 손은 위로 치켜들고, 다른 손은 허리에 올린 엘바는 소리를 지르며 자신의 승리를 만끽했다.
나는 잠시 후 일어나서는 창문으로 향했다. 밖을 바라보니 언제 비가 왔나 하듯 햇빛이 쨍쨍하게 비치고 있었다.
오랜만에 진행하는 ‘한글의 미’
나는 돌아서 방으로 향했다. 걸음이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방에 도착해서는 행사 준비를 위해 필요한 도구를 챙겼다.
행사 장소는 테아트로 광장(plaza de teatro)으로 정했다. 지난번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보니 꽤 많은 사람이 지나다니는 곳이었다. 주변에 정류장과 상가가 많은 것이 가장 큰 이유이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오늘이 평일이어서인지 주말에 사람들로 북적이던 극장은 문이 닫혀 있었다. 그 입구 앞에 떡하니 자리를 잡았다.
극장 입구라서 그런지 비싸 보이는 대리석이 깔려 있었다. 딱딱한 대리석이 앉기에는 불편했지만 행사를 진행하기에는 최적의 조건이었다.
행사를 준비하는 내 모습에 관심이 생긴 현지인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물론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좋지만 이때 조심해야 할 것이 바로 분실 사고다. 특히, 아시아인만을 타깃으로 삼아 도둑질하는 사람이 있다고 숙소 주인인 호세에게 듣고 나왔기에 신경이 더 곤두섰다.
오늘 행사를 진행할 장소는 다행히 뒤쪽에 벽이 있었다. 그래서 내가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이 줄었다.
소녀, 또 다른 이름은 엄마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사람이 다녀갔다. 그중 기억에 남는 사람이 바로 엘리사였다. 딱 고등학생처럼 보이는 소녀였다. 그녀는 데려온 아기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아기의 이름은 ‘카랄레’였다. 큰 눈망울을 가진 아기는 내가 신기했는지 계속해서 쳐다보고 있었다.
엘리사는 남미에 많다던 미혼모였다. 나이는 18살. 우리나라에서는 한창 학교를 다닐 나이지만 아이를 기르는 데 전념하고 있었다.
그녀는 평소 한국 드라마를 자주 본다고 했다. 육아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이것저것 하다 보니 한국 드라마를 알게 됐고, 한국 드라마를 보면 스트레스가 잘 해소된다며 나에게 엄지 척을 해주었다.
엘리사는 드라마를 보다가 한국을 더 잘 이해하고 싶어서 한글과 한국 문화를 공부하게 됐다.
그녀는 나에게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드라마가 겨울연가라며 주인공인 배용준 씨 이름을 써달라고 했다.
완성된 작품을 받아든 그녀는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나를 따뜻하게 만들었다. 카랄레 역시 엄마의 미소를 보면서 좋아했다.
나는 두 모녀와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그들이 떠나는 뒷모습을 보면서 훈훈하면서도 한편으론 씁쓸함이 몰려왔다.
2시간 동안 행사를 진행하면서 사연 있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그들에게 들은 이야기는 나를 다시 돌아보게 했다.
행사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 그들이 나에게 준 팁과 오렌지가 오늘 행사의 만족도를 대변해줬다.
<추윤호 캘리그래퍼>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많이 본 기사
이 기사를 스크랩 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