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잊혀진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日, 반볼셰비키 지원 ‘극동지역 지배’ 야욕 드러내

입력 2017. 12. 12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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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日 4월 공세 최재형 감옥에



 

니항전투 참패 日 ‘생명 등 위협’ 구실 시베리아 장악 나서

혁명군 무장 해제 명령·우수리스크 철도 중심으로 총공세

한인 마을 습격한 후 도망가지 못하게 가두고 불 지르기도


여러 곳에서 임시정부가 구성되자 이를 통합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대한국민의회는 통합된 임시정부를 한인이 많이 살고 독립전쟁에 유리한 간도나 연해주에 두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상하이의 임시정부는 일본군이 시베리아로 진격 중이라는 이유로, 서양 열강의 조계(租界)가 많아 외교활동을 펴기에 유리한 상하이에 두자고 주장했다.


대한국민의회와 상하이 임시정부의 완전 통합은 실현되지 않았으나, 상하이 임시정부 측에서 보면 대한국민의회의 이동휘가 국무총리에 취임함으로써 그 권위와 대표성은 크게 강화됐다.

여러 차례 논의한 결과 통합된 정부의 위치는 상하이에 두고 정부 명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하며, 한성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이승만을 대통령, 이동휘를 국무총리로 하는 우리 역사상 최초의 공화제 정부가 성립됐다.

이즈음 러시아 로마노프 황가의 군대인 백위파는 볼가 강에서 볼셰비키 혁명군인 적위파와 접전을 벌이다 패배했다. 백위파 군대는 점점 무너져갔다. 러시아 남서부에서 위력을 떨치던 데니킨군은 1919년 하반기에 크게 패배하고 말았다. 이런 흐름은 시베리아까지 퍼졌다. 콜차크의 시베리아 정부는 1919년 11월 14일 소비에트 적위파 군대에 옴스크를 내줬다. 콜차크 부대는 이르쿠츠크로 퇴각했고 백위파는 점점 힘을 잃었다.

1920년 1월 31일, 블라디보스토크 백위파 정권이 완전히 무너졌다. 볼셰비키, 멘셰비키, 사회혁명당은 연합해서 연해주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그 뒤 세르게이 라조를 수반으로 한 군사 소비에트가 조직됐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실제 권력은 볼셰비키에 넘어갔다. 세르게이 게오르기에비치 라조(Сергей Георгиевич Лазо)는 1916년 군대에 징집됐고 모스크바 알렉세예프스크 보병학교를 졸업했다. 그 뒤 1916년 12월 장교가 돼서 크라스노야르스크에 배치됐다. 당시 라조는 병사들을 상대로 사회혁명당 좌파 사업을 전개했다. 1918년 초 러시아사회민주당에 가입했고 자바이칼 전선군 지휘관이 됐다. 1919년 12월 연해주 군사혁명사령군 사령관이 됐다(윤상원, 박사학위 논문: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1918~1922), 2009, 88쪽).

이후 한인들과 적위파 혁명군이 4월 참변을 맞게 되는데 바로 니항 전투가 큰 원인이었다. 러시아 혁명 직후 ‘볼셰비키 붉은 군대’와 반볼셰비키인 ‘백위파 및 외국 간섭군들’ 간에 피비린내 나는 내전이 시작됐다. 1918년 초 러시아 내의 자국민 보호를 구실로 블라디보스토크 항구에 군함을 상륙시킨 일본은 레닌의 볼셰비키파와 대립하던 반볼셰비키 백위파 군대를 지원하며, 극동지역에 대한 야욕을 드러냈다. 이때 만주, 러시아 및 조선의 국경지대에서 활동하던 한인 무장빨치산들은 러시아 빨치산 부대들과 연합해 일본 및 백위파 군대를 상대로 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최재형이 잡혀가기 전까지 살았던 우수리스크 집은 현재 최재형박물관으로 리모델링 공사 중이다.

1920년 3월 5일에는 하바롭스크 북동부의 니콜라옙스크 항구(니항)에서 한인이 포함된 러시아 부대에 일본군이 참패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시베리아를 장악하려는 일본의 강경파에 좋은 구실을 주었다. 일본 정부는 1920년 3월 31일 “일본 신민의 생명·재산에 대한 위협”과 “만주 및 조선에 대한 위협”이 엄존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에 앞서 일본은 1920년 3월 중에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롭스크, 기타 연해주 도시에 있는 적위군 부대를 전면적으로 공격하도록 비밀명령을 내려놓고 있었다. 여기에는 한인부대와 한인사회도 포함돼 있었다.

1920년 4월 4일, 야간을 틈탄 일본군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사령관 무라다 소장은 다이쇼 군사령관의 지시를 받아 블라디보스토크 혁명군의 무장해제를 단행했다. 4월 5일 새벽에 군사령관은 제13·14사단장, 남부 우수리스크 파견대장에게 각지의 혁명군 무장해제를 명령했다. 또한, 우수리스크 철도를 중심으로 총공격을 감행했다.

일본군은 4일 밤부터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에 5일부터 6일까지, 스파스크에는 8일까지 계속 공격을 퍼부었다. 일본군은 한인 마을을 습격해 한인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가둬놓고 불을 지르기도 했다.

한편 최재형은 급히 우수리스크에 있는 가족들의 집을 찾았다. 그러나 이미 일본의 밀정 기토가 최재형의 집을 에워싸고 있었다. 최재형의 가족들은 급히 찾은 최재형에게 빨리 도망치라고 했지만, 최재형은 자신이 도망치면 가족들이 당할 고초를 생각하며 식구들의 간절한 만류를 뿌리치고 일본군에게 잡히고 만다. 최재형과 함께 잡힌 사람은 모두 76명이었다. 그중에서 72명은 풀려났으나 최재형, 엄이직, 황 카피톤, 이경수 네 명은 감옥에 갇혔다.

참고서적: 박환 저 『시베리아 한인민족운동의 대부 최재형』, 문영숙 저 『독립운동가 최재형』, 윤상원 박사학위 논문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1918~1922)」<문영숙 작가·안중근 홍보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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