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한글장수의 무작정 세계일주

지구 반대편, 문화는 달라도 타이포그래피로 통해요

입력 2017. 12. 07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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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새로운 관계


수크레 호스텔을 나와

인파 많은 광장에서 캘리 연습

내 작품에 관심 보인 나탈리에게

한글 캘리그래피 이름 써서 선물

 

어제 앨바와 노느라 뻐근해진 몸을 이끌고 나온 나는 3인용 소파에 쓰러지듯 앉았다. 나보다 앞서 앉아 있던 새끼고양이 ‘미코’가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며 날 쏘아봤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스페인어 책을 펼쳐 들었다. 그런 내가 못마땅했는지 어느새 미코가 내 옆으로 와 앞발로 나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이에 질세라 나도 그 녀석 목덜미를 잡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나 미코는 잽싸게 다시 올라와 나를 밀었다. 그러기를 수차례, 결국 내가 포기해야만 했다. 그런 미코를 뒤로한 채 나는 산 프란시스코 성당으로 향했다. 광장 주변의 계단에서 캘리그래피 연습을 시작했다. 한 여성이 나에게 다가왔다. 나탈리라는 이름을 가진 그녀는 타이포그래피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글로 된 타이포그래피를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라면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게 그녀와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타이포그래피와 관련된 대화를 나눴다. 문화가 다른 사람들끼리 같은 관심사로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좋았다. 이것이 바로 여행의 매력이지 싶었다.


지루한 싸움의 시작

화사한 햇빛이 창문 틈으로 파고들어 따뜻함이 느껴지는 아침이었다. 전날 앨바와 노느라 뻐근해진 몸을 이끌고 거실로 나온 나는 소파에 철퍼덕 앉았다.

그 소파에는 ‘미코’라는 이름을 가진, 호세의 새끼고양이가 큰대자로 누워 있었다. 내가 앉자마자 미코는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쳐다봤다.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것이 영 불쾌했나보다.

하지만 나는 그 녀석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소파에 앉아 스페인어 책을 읽었다.

미코는 내 옆으로 다가와 발로 나를 밀었다. 나는 그 녀석의 목덜미를 잡아 들고 바닥에 내려놓았다.

미코는 잽싸게 다시 소파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나를 밀기 시작했다. 나는 또 그 녀석의 목덜미를 잡아 바닥으로 내려놓았다. 그렇게 지루하면서도 약간은 유치한 싸움이 시작됐다.



포기를 모르는 미코

거실에 있던 사람들은 우리의 싸움을 마치 개그 프로그램 보듯 웃으면서 지켜봤다.

나는 그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나 응원하는 거 맞는 거지?”

당연히 내 편을 들어줄 것으로 믿고 던진 이 말에 사람들은 손사래를 치며 ‘아니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오히려 미코를 응원하는 목소리를 더 높였다.

결국엔 포기할 줄 모르는 미코 녀석 때문에 나는 그 싸움을 포기했다. 그리고 바닥에 앉아 스페인어 공부를 이어 갔다.

미코는 밀고 당기는 싸움 때문에 피곤했는지 소파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나도 모르게 그 녀석을 쓰다듬었다.

내 손길에 깬 그 녀석은 힐끗 나를 쳐다보더니 손을 깨물었다. ‘이 녀석과는 친해질 수 없는 걸까?’ 생각하면서 그 자리를 떴다.

타이포그래피에 푹 빠져 있는 음악선생님 나탈리와 함께 찍은 사진.

예술가세요?

미코에게 밀려(?) 수크레 호스텔을 나온 나는 바로 앞에 있는 산 프란시스코 성당으로 향했다. 여전히 그곳은 인파가 많았다. 광장 주변에는 휴식하기 위해 나온 현지인들이 많이 보였고. 광장 중앙은 비둘기 떼로 가득했다.

나는 캘리그래피 연습을 하기 위해 광장 주변의 계단에 자리를 폈다. 그리고 먼 하늘을 바라보면서 내가 좋아하는 문장들 위주로 연습하기 시작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문장은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오는 ‘현재를 즐겨라’다. 그렇게 연습에 집중하고 있을 때 한 여성이 다가왔다.

“예술가세요?”

나탈리라는 이름을 가진 그녀는 내 작품에 큰 관심을 보이면서 본인은 주변 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는 선생님이라고 소개했다.



한글 타이포그래피를 직접 보다니

그녀는 평소에 타이포그래피에 관심이 많았는데 한글과 관련된 타이포그래피를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어서 지금 너무 흥분된다고 말했다.

그렇게 우리는 타이포그래피라는 공통 관심사를 가지고 이야기했다. 나는 나탈리에게 앞으로의 목표를 말해주었다. 5년 안에 한글과 관련된 디자인 상품을 만들 것이라고.

내 목표를 들은 나탈리는 놀란 표정으로 엄지를 들더니 멋진 꿈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그 디자인 상품이 나오면 본인이 꼭 구매하겠다고 약속까지 해주었다.

그녀와 타이포그래피 관련 대화를 나누는 것이 너무나 즐거웠다. 한 시간이라는 시간이 야속하게도 금방 지났고, 약속이 있었던 나탈리는 아쉬움을 표현하면서 이별 인사를 했다.

떠나기 전, 한글 캘리그래피로 그녀 이름을 써서 선물로 주었다. 나탈리는 어린아이처럼 콩콩 뛰며 좋아했다.

그녀가 떠난 뒤 짐을 정리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문화가 다른 사람들끼리 같은 관심사로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좋았다.

이것이 바로 여행의 매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추윤호 캘리그래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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