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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1500년 이상 이어온 ‘민족의 영산’

입력 2017. 12. 04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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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 백두산인가, 장백산인가



대한민국 지도 꼭대기에 있는 높이 2744m의 산 이름은? 아마 한국인 대부분이 ‘백두산’이라고 대답했을 테다. 하지만 중국인들에게 같은 질문을 한다면 아마 ‘장백산’이라는 좀 다른 답이 나왔을 것이다. 2014년에는 유명 한류스타가 ‘장백산’을 취수원으로 하는 생수 CF 출연문제로 큰 논란이 됐던 일도 있었다.

삼국유사·고려사·고려사절요 등 백두산으로 기록

  

백두산과 장백산, 왜 논란이 되는 걸까? 오늘은 백두산 명칭의 연원과 의미를 알아보고 또한 중국이 왜 장백산 명칭에 집착하는지 등을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한다.

백두산(白頭山)은 ‘하얀 머리 산’이라는 의미로,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이름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백두산에는 여러 명칭이 있었다. 백두산 관련 명칭을 정리한 실학자 한치윤은 백두산의 옛 명칭으로 불함산·개마대산·도태산·태백산 등을 제시한다. 여기서 불함산은 퉁구스어로 무당을 뜻하는 ‘불이간(不爾幹)’에서 유래해 ‘신성한 산’이라는 의미다. 태백산은 ‘크다’라는 의미와 ‘하얗다’라는 의미로 항상 눈 덮인 산을 뜻한다.

한편 조선시대에는 우리나라에서도 백두산을 장백산과 혼용하기도 했다. 여기서 장백산은 여진이 백두산을 만주어로 ‘가이민 상견 아린(Golmin xanggiyan alin)’으로 부른 데서 유래했다. 여기서 ‘가이민’은 길다, 항상, ‘상견’은 하얗다, ‘아린’은 산이란 뜻이므로 중국 한자로 장백산이라 쓰인 것이다. 결국 ‘항상 하얀 산’이라는 의미에서는 ‘백두산’ ‘태백산’과 비슷한 의미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에서는 ‘백두산’으로, 중국에서는 ‘장백산’으로 부르면 되겠네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것이다. 중국은 동북공정 이래 현재의 만주땅 일대가 중국 역사의 공간임을 강조하기 위해 고구려 역사를 중국사로 바꾸려 했다. 그러나 이것이 여의치 않자 최근에는 고구려 역사와 우리 민족의 상징들을 지워나가고 있다. 그 일환으로 우리 민족의 상징인 백두산 명칭을 철저히 배제하고 장백산 명칭만을 고집하며 각종 시설과 관광공간의 이름을 장백산으로 만들고 있다. 백두산으로 포괄되는 우리 민족의 역사, 문화, 영토영유권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백두산이냐 장백산이냐의 문제가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

 

 

장백산은 1000여 년 전 일시적 현상 담고 있는 명칭


그러면 중국은 어떤 근거를 가지고 ‘장백산’이라 주장하고 있으며, 또 우리는 ‘백두산’에 대한 어떤 역사적 근거를 가지고 있을까? 먼저, 중국 사료 가운데 ‘장백산(長白山)’ 명칭이 사료상에 처음 나온 시기는 11세기경으로 거란 민족이 세운 요나라 성종 통화 30년(1012) 기록이다. 또한 ‘장백산’의 한자 의미, ‘긴 하얀 줄기’라는 뜻은 백두산의 화산활동으로 나타난 거대한 수증기나 연기를 멀리서 보았을 때 붙여진 이름으로 파악된다. 즉 백두산의 화산 폭발이 활발했던 시절과 연결된 일시적인 명칭인 것으로 보인다.

한편 백두산이라는 이름이 우리 역사상 최초로 사용된 것은 『삼국유사』에서다. 『삼국유사』에는 ‘오대산은 백두산의 큰 줄기’라는 대목이 있다. 많은 학자는 이 시대가 성덕왕 재위 시기이므로 ‘백두산’ 명칭이 8세기경부터 사용됐다고 보고 있다.

백두산은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출자를 전하는 『고려사』에도 나타난다. 즉, 태조 왕건의 첫 조상인 6대조 호경(虎景)은 성골 장군으로 백두산으로부터 개성 지역으로 내려온 것으로 기록돼 있다. 또한, 991년 고려 성종 10년에 『고려사절요』를 보면 ‘고려가 여진을 두만강 이북으로, 백두산 이북으로 내몰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백두산이 고려의 영역 인식의 중요한 기점임을 보여준다.

 

 

중국, 우리 역사와 민족의 상징들을 의도적 삭제 

뒤이어 백두산은 고려 시기 우리 민족의 융합정신을 보여주는 상징물이 되기도 했다. 즉, 고려 인종 9년(1131) 묘청이 고려의 여덟 군데 명산의 신령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제사하는 8성당을 평양에 지었는데 그중 첫 번째가 백두산이었다. 즉 연대가 명확한 것만 따져봐도 고려에서는 성종 10년(991)에 이미 백두산이 쓰였고, 더 올라가면 고려 초 왕건의 6대조의 출자 지역으로 등장하며, 그 이전의 신라 성덕왕 시기 기록에서까지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백두산은 1500여 년 이상 이어온 전통 있는 명칭인 데 비해 장백산은 1000여 년 전 일시적 현상을 담고 있는 명칭인 것이다.

우리나라 애국가는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이라는 첫 소절로 시작한다. 그런데 요즘 동해는 일본해로, 백두산은 장백산으로 바꾸려는 동북아시아의 국제 상황이 이 애국가의 첫 소절을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백두산은 고구려 이래 우리 민족과 여진족의 신성한 산에 대한 기억을 모두 담고 있는 가장 대표성 있는 명칭이다. 이제 이 명칭으로 상징된 문화와 영역에 대한 더 체계적인 연구를 통해 우리 민족이 이를 부각하고 강조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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