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현대 군사명저를 찾아

평화와 민족 위해 이토 처단한 ‘구국의 별’

입력 2017. 12. 03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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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독립전쟁 영웅 안중근



1907년 11월 말부터 3년간

안중근 장군, 러시아에서 활동

12인 단지동맹 결성·이토 처단한

연해주는 독립전쟁의 중심지

 

‘이토를 실수로 죽였다’

거짓 자백 회유했으나

척결한 15가지 이유 밝혀

日 검찰관·감옥 간수도

장군의 의연한 기개에 감복  


“안중근 장군의 하얼빈 의거를 러시아 연해주에서 준비한 것을 아시나요?” 요즈음 대학생이나 주변 어른들에게 물으면 십중팔구는 모르고 있는 표정이다. 안중근 하면 만주지방에서 의병운동을 하다가 만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척살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약손가락을 자른 단지도 연해주에서 했다니, 과연 연해주는 보면 볼수록 독립전쟁의 발원지답다.

탐방단은 여행 3일 차 아침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3시간을 버스로 달려 크라스키노의 안중근 단지동맹비를 찾았다. 전에는 이곳이 연추 마을이었는데 1937년 스탈린에 의한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 후 마을 이름도 크라스키노로 바뀌고 러시아인들이 거주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단지동맹비도 본래 위치에서 1㎞ 정도 북쪽 모 한국기업의 알로에농장 입구로 옮겨져 지금은 초원 한가운데에 잘 정비돼 있다. 인접 지역의 핫산 전망대에 오르니 크라스키노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국경지대의 군사도시로서 지금은 러시아 연대가 주둔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연추는 한말 독립운동의 중심지다.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이자 독립전쟁의 밀알 최재형 선생이 살던 마을이고 국내 진공작전을 펼친 항일무장단체인 동의회가 활동한 장소이며, 안중근이 단지동맹을 결성한 곳이기도 하다.



안중근의 초기 생애

안중근은 1879년 황해도 해주부 수양산 아래에서 진해현감 안인수의 손자이자 진사 안태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등에 검은 점이 7개 있어 북두칠성의 기운으로 태어났다는 뜻으로 응칠(應七)이라 불렀으니 그 자긍심이 대단했을 것이다. 어릴 때 아버지의 서당에서 8~9년간 한학을 공부해 후일 그가 남긴 유묵 작품의 철학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말타기와 활쏘기를 더욱 즐겼고 집안에 드나드는 포수꾼의 영향으로 사냥에 능하여 명사수로 소문났다.

1894년의 동학농민운동이 황해도까지 확산되자 황해도 관찰사의 요청으로 아버지 안태훈이 동학농민군 진압작전에 참여하니 소년 안중근도 동학군 토벌에 참가했다. 자서전에서 동학도를 좀도둑이라 한 것을 보면 국가에 충성해야 한다는 그의 국가관을 볼 수 있다. 1895년에 천주교학교에 입학해 신학과 프랑스어를 배우고 토마스라는 세례명을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된다.

1904년 평양에서 석탄 장사를 하다가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고 국권 회복을 위해 중국 상해로 갔다. 그러나 그곳 유력자들과 천주교 신부들로부터 협조를 얻지 못하고 부친상으로 인해 고향에 돌아온다. 이후 석탄회사를 정리하고 교육과 실력 배양을 위해 삼흥학교를 세우고 돈의학교를 인수해 교육에 힘쓴다.




안중근의 의병전쟁과 단지동맹

1907년 이토 히로부미가 주도한 강제적인 정미7조약 체결과 군대해산에 항거해 의병이 각지에서 봉기하고 있던 절박한 시국에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다시금 외국행을 결심한다. 1907년 북간도로 갔으나 일본군이 득세해 몇 달간 각지를 시찰만 후 러시아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로 간다. 안중근이 러시아 지역에서 활동한 기간은 1907년 11월 말부터 1910년 10월 22일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하얼빈으로 가기까지 3년이다. 그의 의병전쟁 활동 무대가 연해주임을 말해주고 있다.

그는 최재형의 동의회에 가담해 몇 차례 의병대장으로 일본군을 공격했다. 그러나 포획한 일본군 포로를 석방하고 그 포로들이 다시 일본군 본대를 이끌고 와서 안중근 부대를 공격해 패배하는 사태가 몇 번 되풀이되자 부하들이 이에 반발하며 떠나버려 그의 의병부대가 해체된다. 이후 단체를 만들어 대한독립에 목숨을 바치자는 각오로 1909년 2월 7일 뜻을 같이하는 동지 12인이 ‘동의단지회’를 결성하고 왼쪽 약지를 끊어 결의를 다졌다. 이때 이토의 만주 방문을 계기로 의병 재봉기에서 이토 처단으로 목표를 바꾸게 된다.



1909년 10월 26일 15가지 이유로 이토 척살

안중근은 이토가 만주지역 장악을 꾀해 러시아 재무장관과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최재형이 사장으로 있는 대동공보로부터 전해 듣고 최재형을 찾아와 그의 집에서 기거하며 사격연습도 한 후 여비와 권총을 지원받아 떠난다. 자서전에 따르면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30분경 안중근은 하얼빈역 열차 안에서 회담을 마치고 러시아 군대를 사열하고 열차로 돌아오던 무리를 향해 권총 네 발을 쏜다. 이어 이토로 보이는 자에게 세 발을 쏜 뒤 도주하지 않고 하늘을 향해 큰 소리로 러시아어로 “코레아 우라!(Корея Ура!·대한민국 만세)”를 세 번 외친 후 러시아 헌병들에게 체포된다. 피격 후 30분 만에 이토가 절명했으니 그의 사격 솜씨가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후일 공판 과정에서 이토를 실수로 죽였다고 자백하면 살려주겠다고 회유했으나 안중근은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서 이토를 죽였다고 주장하며 ‘한국의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등 ‘이토를 죽인 이유 15가지’를 당당하게 밝히고 있다. 그의 의연한 기개에 일본 검찰관도 놀라고 감옥의 간수들도 감복해 그를 후대했으며 히라이시 고등법원장도 감명받아 ‘동양평화론’ 저술을 허가해 주었다고 자서전에서 쓰고 있다. 거사를 배후에서 도운 최재형이 러시아인 변호사를 준비시켰으나 일본은 이들의 접견을 금지했다.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의 말씀대로 항소하지 않고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5개월 만에 순국하게 된다. 그의 무덤을 아직도 찾지 못하니 안타까운 일이다. 연추의 단지동맹 기념비에는 15개의 돌을 놓아 이토를 죽인 15가지 의미를 기리고 있다.


‘동양평화론’의 혼 계승해야

‘동양평화론’은 안중근이 옥중에서 집필한 미완의 글이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한·중·일 3국이 각각 독립을 유지하면서 공동 화폐, 군대 등 상부상조하는 길을 찾고, 이를 통해 서양 세력이 동양을 점령하고자 하는 서구 제국주의를 막을 때 동양평화를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일본이 침략적 속성을 합리화하기 위해 만든 대동아공영권 논리의 함정과 모순을 이미 꿰뚫어 보았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이토가 바라는 동양평화는 이웃 나라를 침략해 일본에 종속시키는 것이었으니 안중근은 이토를 동양평화 분열자로 판단해 그를 저격하게 된 것이다.

이후 5개월간의 수감 생활과 공판 과정에서 안중근은 이토 사살이 동양평화를 지키려는 정의의 응징이었음을 줄기차게 강조했다. 그는 하얼빈 의거를 ‘동양평화 의전(義戰)’으로 기술하면서 사형장의 최후 발언도 “나의 이 거사는 동양평화를 위해 결행한 것이므로 임석 제원도 앞으로 화합에 힘써 동양평화에 이바지하기 바란다”였다. 그는 옥중에서 200여 점의 휘호를 남겼다.

안중근의 구국정신은 세종대왕·이순신과 함께 조선 518년을 지켜낸 3대 위인으로 꼽아 마땅하다고 본다. 안중근의 호칭이 의사·영웅·장군 등 다양한 것은 그만큼 그의 역할이 다양하고 위대한 불세출의 영웅이기 때문이다. 육군에서는 그의 뜻을 기려 2010년부터 안중근 장군으로 호칭하고 육군본부에 ‘안중근 회의실’을 운용하고 있다.

현재 한반도 주변 정세는 구한말 상황 못지않은 판도를 보이고 있다. 중국은 더욱 강해졌고, 일본과 러시아는 다시금 군사 강국을 지향하며 대한민국을 압박하고 있으며, 북한은 핵미사일 개발 완성 단계에 있다. 이에 북한의 핵 위협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고 주변 강대국 사이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는 대한민국이 통일을 이루어 강국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안중근과 같은 이 시대의 애국지사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때다. <김칠주 가톨릭대학교 안보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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