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잊혀진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태극기 행진·연극 공연… 항일 독립 열기 ‘활활’

입력 2017. 11. 21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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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안중근 장군의 이토 저격 연극 지원


국치일 맞아 신한촌 민회 이름 인쇄물 배포

한민학교 학생들은 애국가 부르며 시가행진

민회 주최 기념행사에 1000여 명이나 참석

이토 저격 을사오적 풍자극 민족의식 고취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개척리는 연해주와 만주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초기 독립운동가들이 대부분 거쳐간 곳이다. 사진은 개척리 한인들의 주요 기관이 있었던 자리의 현재 모습. 필자 제공

 


재러 한인들은 대대적으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중앙기관을 설치하고 독립운동가들이 앞장서서 블라디보스토크 일대에서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했다. 보이스카우트들을 동원해서 독립기를 앞세우고 도시를 돌아다니며 연합국 인사들 앞에서 한국인의 의기를 보여주고 한국인의 의기에 연합국들의 공감을 구하려는 계획이었다.

시위운동을 벌이는 당일에는 조선인이 경영하는 상점 및 조선인학교가 모두 휴업과 휴학을 하기로 했다. 지역별로 우선 니코리스크에서 300여 명, 블라디보스토크에서 200여 명의 보이스카우트가 참여할 예정이었다. 2월 24일 보이스카우트를 대표하는 김 아파나시는 블라디보스토크의 청년대표자를 만나 서로 협력할 것을 협의했다. 시위운동에 참가하는 청년들은 이날 몸을 희생해서라도 조선독립을 위해 전심전력할 것을 맹세했다.

시위대는 니코리스크 중앙위원회 내에 군부를 조직하고 집행위원을 선정해 독립군을 편성하려고 했으나, 독립군 조직에 관해 중앙위원회 간부들 사이에 의견이 둘로 나뉘었다. 하나는 미하일원의 조선인 특별대대에 병합시켜야 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미하일원의 부대와 전혀 별개로 다른 부대를 편성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외에도 일부 독립운동가들은 군대 조직은 불가능하니, 다수 선발대를 조선 국내에 파견해 일본과의 분쟁을 야기하고 파리 평화회의의 관심을 끌자고 주장했다.

 

러시아 극동지역 최대 항구도시 블라디보스토크는 소련 시절부터 극동함대 사령부가 있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필자 제공

 


3·1운동이 일어나기 전에도 재러 한인들의 민족의식은 8월 29일 국치일 집회, 연극 공연 등을 통해 크게 고양된 상태였다.

신한촌에서는 1918년 8월 29일 아침 일찍, 민회의 이름으로 동포들에게 인쇄물을 배포했다. 내용은 밥을 짓지 못하도록 각 구장에게 감시하게 하고, 만약에 밥을 짓는 집이 있으면 조서를 작성해 25루블의 벌금을 부과하도록 했다.

오전 9시 한민학교 학생 수십 명은 학교기를 들고 선두에서 애국가를 부르며 신한촌을 행진했다. 10시에는 민회와 한민학교 문 앞에 태극기를 게양했다. 11시에는 한민학교 학생 수십 명이 태극기를 들고 신한촌을 순회했으며, 인솔자 이봉극은 수시로 길가에서 연설을 시도했다. 오후 7시부터는 한민학교 운동장에서 신한촌 민회 주최로 1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치일 기념행사를 거행했다. 행사는 임시회장인 민회 서기 조창원의 개회사에 이어 한민학교 여학생들이 창가와 역사 이야기, 지리 이야기에 이어 기념사, 애국가 제창, 폐회사 등으로 이어졌다.

특히 항일운동의 중심지 얀치혜 지역은 1918년 8월 29일 국치일에 얀치혜 지역의 민회장인 최재형과 교사 정남수, 니코리스크 기자 정안선 등이 중심이 돼 학교에서 연극을 공연했다. 최재형은 이 연극을 적극 지원했는데 이 연극은 교민들의 민족의식 고취에 크게 기여했다. 이 연극은 8월 28일 밤에 시작해 나흘 동안, 오후 5시부터 밤 11시까지 공연됐다. 연극의 내용은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이었으며 을사오적, 7적이라 불리는 친일파의 행동과 당시 일본 고관의 언동 등을 풍자했다.

29일 밤에는 수청 지방에서 온 동포들도 많아서 총 관객수는 1200명이나 됐다. 이 연극은 3·1운동을 앞두고 활발하게 전개된 민족의식 고취에 크게 기여했다.

1918년 가을, 일본 총영사 기쿠치 기로는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신한촌을 시찰하고 한인학교에 200루블을 기증했다. 여자 교사는 그 돈을 받자마자 찢어 불 속에 던져버렸다.

그 뒤 서울 총독부의 고위관리인 지사쿠 시노다가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을 시찰하러 왔다. 지사쿠는 1919년 3월 1일 한인학교를 방문했고, 이틀 후에는 대한국민의회 블라디보스토크 지부 의장인 한용헌을 만났다. 한용헌은 지사쿠에게 일본 제국주의자가 아시아의 평화를 돕지 않는다고 일본 제국주의를 비판했다. 또한, 한민족은 일본에 폭력을 쓰지 않으면서도 줄기차게 저항할 것이라고 밝혔다. 지사쿠는 1919년 3월 4일에 다시 학교를 방문했다. 그 뒤 일본 참모부장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고했다.

“신한촌은 지금 러시아 당국의 통제 밖에 있으며, 안드레이 한과 그의 추종자들 밑에서 완전히 통제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회주의자이며 극단적 반일주의자인 그는 자신의 생각을 널리 선전하고 있다. 이들을 무마하고 제국의 통치 아래로 끌어들이는 것은 긴급하게 필요하나 쉽지 않은 일임을 확신한다.”


참고서적: 박환 저 『시베리아 한인민족운동의 대부 최재형』, 문영숙 저 『독립운동가 최재형』

<문영숙 작가/안중근홍보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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