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잊혀진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거물급 대신 얼굴 안 알려진 인물로 日 감시 따돌려

입력 2017. 11. 14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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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윤해·고창일을 선정한 이유



 

“두 대표 고베서 배로 출발” 발표

실제론 시베리아 철로 통해 이동

문창범, 전로한족회중앙총회 기반

임시정부 ‘대한국민의회’ 구성



전로한족회중앙총회를 기반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 탄생한 대한국민의회의 관계자들이 기념 촬영을 하는 모습. 필자 제공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할 인물로 윤해와 고창일을 선정한 이유를 살펴보기로 한다. 두 사람을 회의 참석자로 선정한 것은 당시 러시아에서 간행되는 각종 신문과 미주 동포들과의 교신에서 얻은 정보에 바탕을 둔 결정이었다.

당시 파리에는 세계 각 지역에서 조선인 대표를 파견하고 있는 상황이라, 노령에서 파견한 사람들도 그들과 함께 일을 할 수 있으면 족하다는 인식을 하게 됐다. 자질은 외국어를 해독할 줄 알고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 세계 정세에 통하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또한 최재형이나 이동휘 등 거물급 인사는 얼굴이 너무 많이 알려져서 일을 추진하는 데 있어 비밀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1월 20일 상해를 출발해 연해주에 온 신한청년당의 여운형은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한 사실을 문창범에게 전하고, 파견 비용과 상해에서 독립운동 전개를 위한 자금을 요청했다. 이에 한족상설위원회는 일을 비밀리에 성공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윤해·고창일을 파견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일은 일본을 따돌리기 위해 연막전술이 필요했다.

니코리스크 한족상설위원회는 2월 7일부터 11일까지 5일간 회의를 통해 파리 대표 파견을 공식화하고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노력했다. 1919년 1월 30일 자 한족상설위원회 회장 문창범과 서기 이춘평의 명의로 각 지방회에 대표 파견을 요청했다.

문창범은 최재형과 같은 함경도 경원 출신으로 최재형보다 열 살 아래였다. 문창범은 미주의 안창호 등과 연락해 1919년 3월 17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전로한족회중앙총회를 기반으로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라는 임시정부를 구성했다. 이후 대한국민의회장의 명의로 독립선언서를 작성해 노령 해삼위(海蔘威)에 있는 일본 영사관과 기타 11개국 영사관에 배부한 후 주민들에게 태극기를 가지고 거리를 행진하며 만세시위를 하도록 독려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문창범은 이후 1919년 4월 13일 선포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각 구성에서, 같은 연해주 지역으로 군무총장 이동휘, 재무총장 최재형과 함께 교통총장에 선임됐다.

한족상설위원회에 참석을 요구한 지역은 모두 107개 지역으로 마감일에는 130여 명이 참가했다. 그 대표로는 노보키예프스크 대표 최재형을 비롯해 지진해 대표 한 안드레이, 김 알렉산드르, 슬라비얀카 대표 박 알렉산드르, 바라바시 대표 강 야코프, 블라디보스토크 대표 한용헌, 윤 니콜라이 등이었다. 이들 참석자 가운데 최재형은 노보키예프스크의 대표적 인물이었으며 박 알렉산드르는 슬라비얀카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2월 7일 회의를 통해 윤해와 고창일이 노령 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됐다고 발표했다. 두 사람은 러시아어와 프랑스어로 조선인 총대표라고 쓴 문서를 가지고 2월 5일경에 니코리스크를 떠나 2월 10일 고베에 기항하는 오뎃사호의 의용함대 톰스크호를 타고 출발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 발표는 사실이 아니었다. 발표대로 고베에 기항할 경우 두 대표가 일본에 체포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윤해와 고창일은 시베리아 철로를 통해 3월 2일 무사히 옴스크를 통과했다는 전보를 받았다. 이처럼 노령 한인 대표 파견은 일본을 따돌리기 위해 주도면밀했다. 그러나 평안도 파가 배제됐다는 이유로 후에 평안도 파가 러시아 지역을 떠나 상해로 가게 되는 이유를 제공했다고도 볼 수 있다.

1919년 2월 25일에 개최된 대한국민의회 창립대회에서 상설위원장 원세훈은 대한국민의회의 취지서를 발표했다. 중앙총회 상설위원 15명은 장래 조선이 독립할 것을 대비해 임시대통령선거, 대외문제 등 일반의 정무를 장악할 기관으로서 대한국민의회를 설립하고자 했다. 당시 여러 사정으로 전 국민을 대표하는 국민의회를 조직할 수 없었기 때문에 상설위원회를 임시국민의회라 명하고 임시국민의회의 역할은 장래 한국이 독립하는 날, 임시 대통령을 선거해 대외문제, 기타 내정, 외교 일반을 관할하는 임시정부로 하는 데 있다고 했다. 이처럼 국민의회의 설립 계획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파견되는 윤해와 미리 상의해 그 중심 계획은 윤해가 작성했고 윤해는 이를 상설위원장 원세훈에게 의탁했다.

전로국내조선인회의는 블라디보스토크에 모여 국내와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받는 임시정부 격인 중앙기관을 니코리스크에 창설하는 한편 정부당국자를 인선하고 한국독립 승인의 최후통첩을 일본 정부에 발송하기로 했다. 일본의 회답을 얻지 못할 경우 중국령 및 노령에 사는 조선인, 그리고 조선 내지에 있는 조선인 일반의 명의로 영구적인 혈전을 선언하기로 결정했다. <문영숙 작가·안중근 홍보대사>

참고서적 : 박환 저 『시베리아 한인 독립운동위 대부 최재형』, 문영숙 저 『독립운동가 최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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