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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자유화’로 시작된 역사적 ‘베를린 장벽 붕괴’

신인호

입력 2017. 11. 05   15:29
업데이트 2020. 11. 06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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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1월 9일 

동독 지도부 샤보프스키의 말실수

규제 완화 방침을 ‘즉시 시행’ 발표

시민들 뛰쳐나와 장벽 부수기 시작


냉전 시대, 독일의 베를린 장벽은 그 존재, 그 이름만으로도 냉전의 상징이었다. 동독은 자국 국민이 대규모로 보다 풍요로운 서독으로 이주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이 장벽을 세웠다. 그러나 표면상으로는 동독 국민을 보호하는 ‘반파시스트 벽’이라고 주장했다. 이 장벽이 어느 날 실수로, 혹은 천우신조로 무너졌다.

동독 국민은 눈부시게 성장하는 서독을 동경해 베를린 장벽을 넘어 탈출을 시도했다. 탈출에 실패해 죽은 이도 적지 않았다. 베를린 장벽은 동독 체제를 굳건히 해주었지만, 자유를 갈망하는 자유민들에게는 악마 같은 존재였다.

본래 베를린을 동서로 나누는 설치물은 철조망 담장이었다. 1961년 8월 13일 하룻밤 사이에 동서 베를린을 나누는 철조망 담장이 생겼다. 서독으로 가려는 시민들을 막기 위해 동독 측이 가설한 것이다. 철조망은 그 후 몇 차례 보수공사를 거쳤고, 그러다 시멘트 장벽으로 바뀌었다. 높이 3.6m의 콘크리트 장벽이 106㎞가량 뻗어 있었고, 나머지 49㎞는 철조망이 세 겹으로 설치돼 있었다. 1980년대의 최종 개량형 장벽은 탈출자들이 잡고 넘어가기 힘들게 만들어졌다.

장벽 바로 뒤편 동독 측 지역에는 60∼70m 폭의 무인지대가 설정돼 있었다. 사전에 출입을 허락받은 이들만 들어가도록 했다. 감시병이 배치되고 서치라이트와 같은 장비와 지뢰도 설치했다. 그럼에도 장벽이 무너지기 직전이었던 1989년 가을까지 5000여 명이 탈출에 성공했다. 탈출에 성공한 이들 이상으로 실패한 이들도 많았다. 경비원, 오인 사격의 희생자 등을 포함해 총 136명의 희생자가 생겼다.

1989년 에리히 호네커의 실각을 전후로 동독 사람들은 언론 자유화, 여행 개방을 주제로 매주 시위를 벌였다. 동독 지도부는 시위대를 달래기 위해 여행 규제를 완화하기로 하고 1989년 11월 9일 오후 6시58분쯤 기자회견을 통해 발표했다.

사실 알맹이는 별로 없는 회견이었다. 그런데 발표자인 정치국원 귄터 샤보프스키는 “서독을 포함한 외국 여행을 ‘자유화’한다”고 말했고, 이탈리아 기자가 “언제부터 시행하느냐”라고 묻자 그는 “지연 없이 즉시(Sofort, unverzuglich)”라고 답했다.

이것은 그의 실수였다. 여행 규제 완화 정책을 심의하는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던 그가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TV를 보던 시민들은 이 내용을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다’고 인식했고, 장벽으로 뛰쳐나왔다. 군인들이 막았지만 소용없었다. 이내 국경을 개방해야 했다. 시민들은 장벽을 통과했고 망치를 들고 부수기도 했다. 장벽이 붕괴된 것이다. 그해 1월만 해도 동독에서는 그 누구도 장벽이 무너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에리히 호네커 동독 사회주의 통일당 서기장은 “장벽이 50년이나 100년은 더 버틸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장벽은 무너지고 그 후 1년도 채 안 된 1990년 10월 3일 독일은 통일됐다.

신인호 기자 < idmz@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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