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한국의 여성독립운동가들

독립선언서 목숨 걸고 고향에 전달…일생을 독립운동에 투신

입력 2017. 09. 03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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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 3·1운동 불씨 지핀 조화벽


1883년 9월 오하이오주 리베나(Revena)지방에서 이름 모를 노부인이 ‘한국여성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기를 희망한다’며 2000달러를 헌금했다. 그 뜻을 전달하기 위해 1년 뒤에는 한국에 파견할 여성대표를 선정했는데 바로 스크랜튼 부인이다.


우리나라의 감리교는 1885년 미국 북 감리교의 선교사 파견과 함께 시작됐고, 한국여성의 배움은 미국 노부인의 귀한 뜻을 담아 실천한 스크랜튼 부인이 1886년 이화학당을 설립하면서 시작됐다. ·




선교사 ‘캐럴’이 호수돈 여학교에 틔운 불씨

호수돈 학교를 창립한 캐럴(Mrs. Arrena Carroll Collyer)은 1902년 12월 원산으로 파송된 선교사였다. 그는 1903년 6월 26일 원산 루씨여학교를 설립한 뒤, 1904년 12월에는 감리회 여선교사들과 함께 쌍소나무집 자리에 18명의 여학생을 받아들여 ‘개성여학당’을 설립했다. 1904년 12월 19일에는 정식 기숙여학교를 건립했지만 18명 중 2명은 나이가 어렸고 2명은 이사를 가서 평균 출석률은 14명, 기숙학생은 12명이 전부였다. 하지만 ‘교육’ 의지 앞에 학생 수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지역의 목요동지회 학부모들이 교사의 월급을 지불했고 학교비용은 선교부에서 지원하는 ‘Eva 장학금’으로 충당되며 개성의 여성교육은 시작됐다. 하지만 아무도 이 작은 여학교에서 3·1운동의 불꽃이 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일제의 조선교육령과 3·1운동의 준비

1911년 8월 23일 일제는 조선교육령을 발표했다. 조선교육령 30조 중 제2조와 제3조, 제5조는 황국신민화를 위한 민족교육말살정책의 의지를 명확히 담았고, 여성교육은 제12조, 제15조, 제16조, 제17조로 규정해 남자교육과 차별을 담았다. 조선교육령이 발표되자 기독교계 학교의 선교사들은 충격에 빠졌다. 기독교계 선교연합회가 ‘기독교학교의 개정교육령에 대한 결의문’을 발표하자, 일제는 사립학교를 폐쇄하거나 관·공립학교로 전환하는 등 본격적인 교육탄압을 시작했다. 그때 3·1운동도 비밀리에 서서히 준비되고 있었다.



양양정명학원 2회 졸업식(1914년 3월 25일)  필자 제공

 

 

 


호수돈 비밀결사대와 개성 3·1운동

3·1운동이 비밀리에 준비된다는 소식을 들은 호수돈 여학생들은 비밀결사대를 조직했다. 학생들은 거사일의 조직적인 활동을 논의하기 위해 저녁시간이면 교내 4층 기도실에서 밀회를 가졌다. 극비리에 기숙생 70여 명을 포섭해 연명선서를 만들었고, 밤새 4층 기도실의 커튼을 뜯어서 태극기를 제작했다. 외부와 접촉을 금하면서 만들어진 태극기는 기숙사에 보관했다.

3월 3일 거사일이 되자, 학생들은 평소와 다름없이 아침 기도회를 향했다. 그리고 조직적으로 분담했던 활동을 시작한다. 중부는 이향화, 동부는 조숙경, 서부는 권명범이 책임을 맡았다. 조화벽을 포함한 다른 학생들은 대장의 암호를 따르며 다음 활동지시를 기다렸다. 대장들이 행동을 개시하자, 학생들은 기숙사 담을 뛰어넘어 대열을 이루며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거리의 행렬에 일본 경찰은 총과 칼로 위협했지만 학생들은 주저하지 않았다. 권애라(權愛羅), 장정심(張貞心), 조숙경(趙淑景)이 주도했고, 이향화(李鄕和), 권명범(權明範), 이영지(李英芝), 류정희(劉貞熙), 조화벽(趙和壁), 김정숙(金貞淑) 등이 대열을 이끌었다. 이윽고 한 학생이 민족자결주의를 연설한 뒤 대한독립만세를 힘껏 외치자, 다른 학생들도 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이를 본 개성시민들도 합세하면서 만세대열은 순식간에 1000여 명 규모로 확대됐고 개성 3·1만세운동의 불꽃은 시작됐다.



솜버선에 독립선언서를 숨기고 독립선언서 전달

전국적으로 3·1운동이 확산되자 일제는 학교 휴교령을 내렸다. 휴교령에 조화벽은 고향 양양을 방문하기로 결심한다. ‘목숨을 걸고 조국독립운동에 투신하겠다’는 비밀결사대의 맹약을 가슴에 담고 3·1운동의 상징적인 문서인 ‘독립선언서’를 고향 양양에 전달하기 위해 가죽가방을 들고 나섰다. 개성에서 경원선 열차를 통해서 원산에 도착한 뒤, 다시 뱃길로 대포항, 그리고 양양으로 향하는 긴 여정에서 조화벽은 독립선언서를 들키지 않기 위해 버선목 솜 사이에 숨기는 기지를 발휘하며 가까스로 삼엄한 검문을 통과했고 양양에 도착했다. 그렇게 목숨을 걸었던 어린 소녀가 전달한 독립선언서는 강원 일대로 확산된 양양 3·1운동의 불씨가 되었다.



유관순 열사 올케 ‘애국계몽운동가’

3·1운동 이후 조화벽은 투철한 국가의식을 가지고 교육계에 뛰어들었다. 공주 영명여학교에 이어 서울 배화여학교, 개성 호수돈여학교, 원산 루씨여학교와 진성여고, 양양 정명학원 등에서 교사로 근무했고 봉급 중 일부를 상하이 임시정부 독립자금으로 지원했다. 원산에서 거주했던 7년 동안은 생활이 어려웠던 선박 노동자를 위한 ‘해원상구회(海員相求會)’의 부회장으로 선출돼 원산항 승선원들의 대책 마련에 앞장서기도 했다.

고향 양양으로 돌아온 1932년에는 양양 정명학원을 설립했다. 1935년 4월 8일 개원 이후 1944년 일제의 강압으로 인해 폐교당할 때까지 6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조화벽은 유관순의 오빠였던 유우석의 부인으로 적극적으로 활동한 여성독립운동가였다. 일생 동안 독립운동을 했던 그의 삶은 호수돈 비밀결사대의 맹약의 실천이 아니었을까.


<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장/부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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