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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원에 잠드신 아버지 그 앞에서 당당하렵니다”

박지숙

입력 2017. 06. 21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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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고 기노상 공군준위(암으로 순직·국가유공자) 아들 기세현 상병


국가유공자 아들인데

왜 현역 입대 했느냐고요?

군인으로 헌신한 아버지 생각에

도망치면 안 되겠다 싶었죠.

대학 입시도 일반 전형으로 치렀어요.

 

전공 과목인 빅데이터 응용해

특급전사 현황 파악 프로그램 만들어

백비호 전우상 받았을 때 너무 기뻤죠.

아버지처럼 직업 군인의 길은 아니지만

제 능력으로 국가에 보탬 되고 싶어요.

 

 

 


 

 

 


육군30사단에서 복무 중인 기세현(23) 상병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군인이었다. 동반 입대한 원동욱 상병에게도 기 상병은 성격 좋고 공부도 열심히 하는 학교 동기일 뿐이었다. 친구의 조금 남다른 가족사를 알게 된 건 입대 후 첫 면담 자리에서였다.


“주임원사님이 국가유공자 아들이면 현역으로 입대하지 않아도 되는데 왜 군에 왔느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깜짝 놀랐죠. 그런데 세현이는 덤덤한 반응이었어요.”

친구 이야기를 듣던 기세현 상병은 부끄러운 듯 속마음을 고백했다.

“사실 입대를 망설였어요. 국가유공자 집안에 아들이 둘이면 한 명만 현역으로 입대하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거든요. 동생은 어려서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고…. 하지만 군인으로 국가에 헌신한 아버지를 생각하니 도망치면 안 되겠다 싶었어요. 비록 곁에 계시지는 않지만, 아버지가 원하시는 것도 제가 떳떳하고 당당하게 군 복무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요. 입대 전에 현충원을 찾았을 때도 그런 마음으로 인사드렸어요. 동생도 입대 시기가 되면 자기 앞에 놓인 선택지를 보게 되겠죠. 스스로 떳떳할 수 있는 올바른 선택을 하리라 믿어요.”

아버지 고(故) 기노상 공군준위는 기 상병이 9살 되던 해 흉·복부 장기 장애(암)로 돌아가셨고, 전상 군경 상이 3급으로 국가유공자로 지정됐다. 공군3방포여단에서 사격통제 전자장비평가관으로 일하던 아버지는 책임감이 강하고 완벽주의에 가까운 성격이라 가족보다는 일이 우선이었다. 살림과 어린 아들들의 양육은 오롯이 어머니 몫이었지만 아버지는 시간이 날 때면 아들과 같이 운동을 하며 놀아주었다.

 

 


 


“아버지 덕분인지 운동 신경이 좋은 편이었어요. 중학교 때까지 축구 선수였거든요. 계속 지원해주기 어려울 것 같아 고민하는 어머니를 보고 운동을 포기한 후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남들은 축구만 하던 녀석이 국제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대학도 쉽게 갔다고 신기해하는데, 어머니 말씀으로는 아버지가 굉장히 머리가 좋아서 집안에서 유명했다고 하시더라고요.”

튼튼한 신체와 뛰어난 운동신경, 좋은 머리까지 아버지를 쏙 빼닮은 기 상병은 하지 않아도 되는 현역 입대를 했을 뿐만 아니라 국가유공자 자녀에게 주어지는 또 다른 혜택도 받지 않았다.

“대학 입시에 국가유공자 전형이 있어요. 그런데 제가 하고 싶은 분야는 없더라고요. 빅데이터에 관심이 많아서 국민대 빅데이터 경영통계학과를 선택했는데 후회는 없습니다. 입대해서도 전공을 살릴 수 있는 업무에 배치돼 정말 좋습니다.”

작전과 행정병인 기 상병은 학교에서 배운 데이터를 응용해 부대의 특급전사 현황을 알 수 있는 프로그램을 구축했다. 그 성과를 인정받아 표창(백비호 전우상)까지 받았다.

“전문적이진 않지만, 부대 발전을 위해 무언가를 했다는 것이 기뻐요. 입대하고 보니 군에 정말 잘 왔다는 생각이 들고 밖에서는 미처 몰랐던 좋은 점들이 많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중 가장 좋은 건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다는 거예요. 사회에 있으면 걱정하고 신경 쓸 부분이 많은데 군에서는 스스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나에게 투자할 시간이 많아요. 규칙적인 생활로 몸도 건강해지고 자기 계발이 절로 되는 거 같아요.”

하지만 군 생활이 즐겁고 보람될수록 그립고 보고 싶은 것은 아버지다.

“크면서 경제적으로 힘들고 그런 건 한 번도 원망해본 적이 없는데 남자로서 의논할 사람이 없다는 게 아쉬웠어요. 괜히 미안하고 속상해 하실까 봐 어머니께는 말씀도 못 드렸죠. 모든 결정을 혼자 하다 보니 책임감이 생기고 더 단단한 사람이 된 거 같기는 해요. 그리고 또 하나, 속상했던 건 가족여행을 못 가 본 거예요. 돌아가시기 전에는 저희가 너무 어렸고 아버지는 다음에 가면 되지 하셨겠죠. 그렇게 아버지가 가족과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했어도 어머니는 늘 아버지가 군인이라는 걸 자랑스러워 하셨어요. 군인은 가족보다 나랏일이 먼저인 게 당연하다고 여기신 거 같아요.”

기세현 상병 가족에게는 아버지가 계신 대전현충원을 찾는 일도 쉽지 않았다. 차도, 면허도 없는 어머니는 아이 둘에다 짐까지 들고 여러 번 차를 갈아타며 종일 걸려 집이 있는 경기도 고양시에서 대전현충원까지 다녀오곤 했다. 전역하는 날 기세현 예비역 육군병장은 그곳을 찾아 이렇게 신고할 것이다.

“아버지! 군대에서 북한의 반인륜적 행태를 지켜보며 아버지가 그토록 국가에 충성했던 이유를 조금은 알았습니다. 아버지처럼 직업 군인의 길은 아니지만 저도 제가 가진 능력을 최대한 활용해 국가에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더는 걱정 마시고 편안한 마음으로 지켜봐 주십시오. 먼 훗날 다시 뵙겠습니다.”

박지숙 기자 < jspark@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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