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6·25전쟁의 진실과 비밀

중공 측의 임시휴전 제안, 숨겨진 속내는 무엇?

입력 2017. 04. 05   17:16
0 댓글

<48> 휴전회담의 함정


 1951년 7월 10일 휴전협상 시작

공군, 임시휴전 때 미 공군 폭격 중단되자

전쟁에 필요한 군수품 대량 수송에 성공

10월 7일 회담 장소 판문점으로 이동 주장

아군이 갖고 있던 개성 땅도 北 차지로…

 

 

휴전회담이 처음 열렸던 1951년 7월 21일 당시의 내봉장.  국방일보 DB




‘공산당과는 회담을 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공산당은 속이는 데 재주가 있고 회담에서 결정된 사항도 쉽게 뒤집는 파렴치한 집단이기 때문이다. 공산당은 선전선동과 기만전술에 능하고 담담타타(談談打打) 전술을 좋아한다. 상황이 불리할 때는 회담을 요청하고 유리해지면 공격하는 전술이다. 파리평화회담, 국공합작, 한국의 휴전회담 등이 이에 속한다.



마오쩌둥이 공산혁명을 일으켜 장제스의 국민당 군대와 싸우고 있을 때 일본이 쳐들어왔다. 마오쩌둥은 장제스에게 회담을 요청하고 국공합작(國共合作)이라는 작품을 만들어 냈다. 즉 일본과 싸울 때는 두 세력이 힘을 합해 싸우고, 국내 문제는 다음에 해결하자는 전술이다. 그러나 공산당 군대는 일본과 싸우는 척하면서 자기 세력만 키웠다. 일본군을 다 물리친 후 공산당은 이전보다 훨씬 강한 군대가 돼 국부군을 공격했고, 결국 장제스 군대는 패해 대만으로 쫓겨났다. 장제스가 속은 것이다.

6·25전쟁이 시작된 지 1년 후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하고 있을 때, 1951년 6월 23일 소련은 휴전회담을 제의했다. 유엔군이나 공산군 모두가 피곤을 느끼고 있을 때 소련의 유엔대사 말리크가 뉴욕에서 CBS라디오 방송을 통해 공식적으로 휴전회담을 제의한 것이다. 미국 국민은 크리스마스 전에 전쟁이 끝나고 군에 간 아들이 고향으로 돌아올 줄 알았는데 전사 통지와 포로 소식만 들려오니 반전 분위기가 역력했다. 미국은 전 소련대사 조지 캐넌을 통해 은밀하게 말리크에게 38선 이북으로 진출해 있던 유엔군이 38선으로 내려가는 조건으로 휴전하자고 정보를 흘렸다. 공산 측 입장에서는 마다할 리 없었다. 공산군은 이미 100만 명이 죽은 상태였다. 휴전회담은 양측 모두에게 희망을 주는 조치로 받아들여졌고 그래서 1951년 7월 10일 휴전협상이 시작됐다.

한국의 입장은 강력 반대였다. 그러나 무초 대사는 “무조건 반대만 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소련이 북한에 제공하는 원조보다 훨씬 많은 것을 제공하고, 한국군이 북한의 공격을 막을 수 있도록 군사원조를 해준다면 이것이 오히려 더 좋은 것 아니냐”고 한국 정부를 설득했다. 정부에서는 여러 조건을 내놨다. 무초 대사는 전제조건을 다 검토한 후 ①한국 장교를 회담 대표단에 포함시키며 ②38선이 아닌 현 접촉선에서 휴전문제를 검토하면 한국이 동의할 것이라고 워싱턴에 보고했다. 이승만의 태도 변화에 미국은 고무돼 회담을 추진시켰다.

휴전회담에 임하는 미국의 의도는 ①한국 내에서 적대행위 중지 ②전투 재개 중지 보장 ③유엔군의 안전보장 ④포로는 1대1 교환이었다. 이에 대해 북한대표 남일은 ①비무장 지대는 양측에서 10㎞씩 철수하며 ②가능한 한 빨리 외국군을 철수시키고 ③평화협상을 추진하자고 주장했다. 회담 중에도 전쟁은 계속됐다.

회담은 진행됐으나 공산 측이 합의사항을 자주 뒤집고 번복하는 바람에 성과 없이 시간만 끌었다. 회담장은 힘겨루기의 또 다른 전쟁터였다. 어떤 때는 6개월씩 회의를 열지 못하는 경우도 발생했다. 상대방 힘 빼기 전략, 이것이 공산당의 전략이다.

제28차 휴전회담(1951.11.27)에서 중공 측이 갑자기 ‘임시휴전’을 제안했다. 유엔군 측이 이에 동의해 30일 동안 휴전에 들어가게 됐다. 사실 당시 중공군은 미군의 공습으로 군수품 수송 차량이 하루에도 300∼400대식 폭격당하는 바람에 식량과 탄약이 다 떨어져 전투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공산당의 담담타타 전술의 팩트(fact)를 모르고 유엔군이 속아 넘어간 사례다. 그들은 비록 임시라고 해도 휴전이 시작되면 미 공군의 폭격이 중단된다는 점을 이용하기 위해 임시휴전을 제안했던 것이다. 이 부분은 우리 국민이 모르고 지나갔다.

중공군은 임시휴전이 시작되자 29, 30일 이틀 동안 엄청난 양의 군수품을 실은 차량들을 전선으로 이동시켰다. 이후에도 전쟁에 필요한 군수품을 대량 수송하는 데 성공했다. 이때 들여온 군수품은 다음해 4∼5차 공격에도 사용할 만큼 충분했다.

임시휴전 기간에는 당연히 전투가 중지됐다. 조용한 가운데 산발적인 탐색전과 진지정찰이 있는 정도였다. 전투가 벌어져도 소규모의 경미한 전투뿐이었다. 문제는 국군과 유엔군에게 전투중지 명령을 누가 내렸는가 하는 점이다. 명확하지 않다. 화살이 밴 플리트 미8군사령관에게 쏟아지자 11월 29일 그는 공격중지명령을 정식으로 부인했고, 유엔군 방송은 ‘작전 속행’ 방송을 내보냈다.

중공군은 3차 공세 이후 한반도에 70만∼80만 명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중국으로부터 보급품을 실어오려면 병참선이 너무 길어 힘들었고 또 미 공군의 폭격으로 밤에만 이동해야 하는 등 상당한 제한을 받았다. 중공군도 1950년 10월 공군을 창설했다. 먼저 5개 항공사단을 창설하고 전쟁 중에 총 23개 항공사단으로 증편했다. 소련제 MiG기를 도입해 50시간의 비행훈련을 시켜 전투에 투입했으나 미 공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1951년 9월 2일 평양 북쪽 상공에서 중공군 MiG-15기 40대가 미 전투기와 공중전을 벌여 4대가 격추되는 등 9월 한 달 동안 중공기 98대가 격추됐다. 10월 이후에도 2, 3일에 한 번씩 공중전을 벌였으나 번번이 패했다. 제공권을 빼앗긴 중공군은 임시휴전을 하지 않았다면 보급 두절로 차기 전투를 하지 못했을 것이다.

회담 장소도 유엔군 측이 많이 양보했다. 최초에 유엔군 측은 덴마크 병원선 ‘주트란디’를 원산만에 정박시켜 거기서 회담을 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공산 측이 개성에서 하자고 주장하는 바람에 개성에서 개최하게 됐다. 그런데 10월 7일 공산 측이 회담 장소를 판문점으로 옮기자고 주장했고 미군은 이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북한은 아군이 갖고 있던 개성 땅을 말 한마디로 차지하게 됐다. 동부전선에서는 아군이 계속 북상하고 있었지만 서부전선은 판문점에 막혀 전진할 수 없었다.

북한은 정전협정 이후 42만 건에 달하는 협정 위반을 했다. 또한 20만 명을 납치해갔다. 그 후에도 기회만 있으면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변경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유엔군 측에서 응하지 않자 1996년 4월 일방적으로 정전협정을 파기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평화협정을 맺자고 주장했다. ‘평화’라는 말에 속으면 안 된다. 북한이 평화협정을 주장하는 이면에는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고 무력으로 통일하겠다는 계책이 숨어있음을 알아야 한다.

휴전회담은 의견이 맞지 않으면 자주 휴회에 들어갔고 회담에 진전이 없자 전선은 고착 상태에 빠졌다.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의 죽음으로 대화가 순조롭게 진행돼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고 3년1개월 동안 끌어오던 6·25전쟁이 일단 끝났다. 협정의 서명자인 유엔군 사령관 클라크 장군은 최종서명을 앞두고 복잡한 심경을 피력했다. 맥아더처럼 만주 폭격을 해서라도 전쟁을 승리로 끝내고 싶었던 장군은 “지금 나는 전혀 기쁘지 않고 희망도 사라졌다. 우리는 공산주의가 패배하지 않은 채 전보다 더 강력하고 위협적인 존재로 남아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배영복 전 육군정훈감>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댓글 0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