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이주형 기자의 기록으로 살피는 역사

호국영웅이 지킨 바다… 서해 수호 결의 다진다

이주형

입력 2017. 03. 25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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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서해수호의 역사


 


24일은 제2회 서해수호의 날이다. 제2연평해전과 천안함 피격 사건, 연평도 포격 도발 등 서해에서 계속된 북한의 무력 도발을 잊지 않기 위한 행사다. 지금도 북방한계선(NLL)이 있는 서해의 잔잔한 파도에는 북한의 도발에 맞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호국영웅들의 숭고한 혼이 잠들어 있다. 그 역사를 되돌아본다.

 

 

 


 


 

 

 

1999년 6월 15일·2002년 6월 29일

 

정전 이후 최초의 남북 해상 교전, 제1·2연평해전

교전규칙, 소극적 대응에서 적극적인 응전으로 수정

 

 


1999년 6월 북한은 어선 보호라는 미명하에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무시하면서 침범 및 철수를 반복했다. 그러던 15일 오전 8시45분경 북한 경비정 7척이 대한민국 해군 고속정에 접근해 충돌공격을 실시하고, 이에 우리 해군도 충돌공격을 가하며 맞대응했다. 양측 간에 혼전이 벌어지던 오전 9시28분 북한 함정이 먼저 사격을 가해옴에 따라 대한민국 해군은 자위권 차원에서 즉각 대응사격을 실시했다. 쌍방 간의 교전은 오전 9시42분까지 14분간 진행됐으며, 그 결과 북한은 어뢰정 1척이 격침되고 5척이 크게 파손당해 북으로 도주했다. 반면에 대한민국 해군은 고속정 5척이 경미한 손상을 입었다. 2007년 연평도에는 이를 기념하는 전승비가 세워졌다.

제2연평해전은 그로부터 3년 후인 2002년 6월 29일 발생했다. 이날 오전 9시54분부터 북방한계선을 넘기 시작한 북한 경비정들은 10시25분 근접 차단을 실시하던 대한민국 해군의 참수리 357정에 대해 집중사격을 가했고, 이에 우리 해군 참수리 357정과 358정이 대응사격을 개시했다. 또한, 인근의 제천·진해함(PCC)과 참수리급 경비정 4척을 투입해 격파 사격을 실시했다. 교전은 오전 10시56분까지 31분간 진행됐다. 안타깝게 북한 경비정으로부터 기습 공격을 받은 참수리 357정이 침몰됐고 6명의 전사자와 19명의 부상자를 낳았다. 한편 북한은 약 3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SO·1급 초계정 등산곶 684호가 반파된 채로 퇴각했다. 정부는 2008년 4월 ‘ 서해교전’으로 불리던 이 전투를 ‘제2연평해전’으로 명명했다. 연평해전을 계기로 우리의 교전규칙은 소극적 대응에서 적극적인 응전 개념으로 수정됐다.

 



북한의 기습공격으로 인해 두 동강 난 천안함의 모습.함미 부분은 같은 해 4월 15일, 함수 부분은 9일 뒤인 24일 각각 인양됐다.  2함대 평택항에 거치됐던 천안함은 현재 2함대 안보공원으로 이전됐다. 해군역사기록단 제공

 

 

2010년 3월 26일

 

결코 잊을 수 없다… 천안함 피격 사건

46 용사·한주호 준위 희생…북한의 중어뢰 공격에 의한 침몰

 


2010년 3월 26일 밤 평화로운 백령도 앞바다에서 해상경계작전을 수행 중이던 1200톤급 초계함 천안함이 북한의 어뢰 공격을 받아 침몰하는 일대 사건이 발생해 세계가 깜짝 놀랐다. 이날 천안함은 밤 9시22분, 6.3노트(시속 11.7㎞)의 속도로 기동하던 중 선체 중간 부분이 두 동강 난 채 침몰했다. 이 사건으로 함정 승조원 104명 가운데 58명이 구조됐고, 46명이 소중한 생명을 잃었다.

또 천안함 탐색·인양작전 과정에서 ‘대한민국 UDT 영웅’ 한주호 준위가 희생되기도 했다. 민·군 합동조사단은 5월 20일 서해 백령도 해상에서 발생한 천안함 피격 사건이 북한의 소행이라는 전말을 밝혔다. 천안함 침몰 원인을 북한제 중어뢰에 의해 발생한 ‘버블제트’로 지목한 합동조사단은 어뢰 프로펠러, 롯트번호, 추진체 성분 등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정밀 분석한 결정적 단서를 제시하며 북한군의 소행이라고 결론 내렸다. 천안함 피격 사건은 6·25전쟁 이후 북한의 도발에 따른 우리 군의 피해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던 가슴 아픈 사건이었다.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은  정전 이후 우리의 영토, 그것도 민간인이 피격 당한 것은 최초의 사건이었다.  북한의 포격에 우리 해병대 장병들이 대응사격을 하고 있다.  해병대사령부 제공

 

 

 

2010년 11월 23일

 

안보의식 높인 연평도 포격 도발

서북도서방위사령부 창설… 국민 80.3% ‘더욱 강력한 대응’ 동의

지난 2010년 11월 23일 오후 2시34분. 정례적인 사격 훈련을 실시하고 잠시 정비 중이던 연평도 해병부대에 북한군의 포탄이 기습적으로 떨어졌다. 장병들은 이에 북한의 무도·개머리 진지에 대응 사격으로 반격에 나섰다. 하지만 북한의 도발로 장병 2명과 민간인 2명이 안타깝게 희생됐다. 북한군도 10명이 사망하고 30명이 부상 당하는 등 상당한 피해를 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정전 이후 우리의 영토가, 민간인이 피격당한 것은 처음이었다. 북한도 우리 민간인 희생에 대해 소위 ‘유감’이라는 표현을 쓰며 자신들의 소행임을 자인했다. 북한의 연평도 도발 후폭풍은 우리 사회 여러 분야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국방부의 대북정책 방향에 변화를 일으켰고, 서북도서방위사령부도 창설됐다. 무엇보다 높아진 것은 국민의 안보의식이었다. 당시 아산정책연구원의 긴급 여론조사에서 전체 응답자 중 80.3%가 ‘연평도 사태 당시 우리 군이 더욱 강력한 군사적 대응을 해야 했다’는 주장에 동의한다고 답한 바 있다.


이주형 기자 < jataka@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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