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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로 구성된‘화랑부대’ 장진호전투서 목숨 건 격전

기사입력 2017. 03. 22   17:56

<46> 전투경찰

서울시경, 北 남침 첫날 전투경찰대 즉각 편성

국군과 유엔군에 배속되어 방어작전·전투 참여

 

한 달간 ‘낙동간 방어’ 1만 여명 참전·197명 전사

휴전 후에도 공비토벌 기여… 1955년 7월 해체

 

 

1946년 경찰 창설 1주년 기념 시가행진.  국방일보 DB

 



경찰이 북한의 남침 소식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무초(Muccio) 미 대사가 전화로 알려준 덕분이다. 남침 소식을 접한 김태선 시경국장은 전국에 비상소집을 명하는 한편 아침 10시에 서장회의를 소집했다. 부국장 최운하 경무관, 경무과장 홍병식 총경, 서대문경찰서장 길경복 총경, 동대문경찰서장 김호우 총경 등이 참석했고 대책 강구에 들어갔다.



의정부에 가장 인접한 성북경찰서장 최병용 총경은 관내 전 차량과 휘발유를 징발하여 서에 집결시키는 한편 돈암동 일대에서 청장년을 동원해서 미아리 고개에 산병호를 구축하고 돈암초등학교에 피난민 대책본부를 설치했다. 또 정부 보유미와 부식을 준비하도록 조치했다. 치안국 비상경비총사령부에서는 경찰 300명을 동원하여 철도 경비를 강화하는 등 매우 분주하게 움직였다.

 

 


한편, 개성 지역에는 국군 1사단이 방어하고 있었는데, 25일 새벽(05:00)에 공격을 개시한 북한군 제6사단은 송악산의 육로를 통과하지 않고 경의선 열차 12대를 이용하여 개성역으로 직접 돌진했다. 적이 갑자기 나타나자 경찰은 국군 1사단 12연대와 함께 1시간 동안 싸웠으나 적을 막아내지 못하고, 첫 전투에서 경찰관 43명 전사, 8명이 부상당했다. 생존자 3명은 국군과 함께 강화도로 철수하였고 개성은 9시30분에 함락됐다.

장단경찰서장 홍은식 경감은 남침 소식을 듣고 21명의 특공대를 편성, 고랑포 지역에서 적 600명과 교전했으나 15명이 전사하고 군부대에 합류했다. 경찰의 피해는 개성, 장단, 파주, 무산, 춘천 지역에서 극심했다. 강원도 사북지서에서는 경찰관 12명 중 9명이 전사했고, 춘천 북방 내평리 지서에서도 지서장 노종해 경위 외 9명이 전사하고 지서는 불태워졌다. 홍천경찰서장 김성기 경감은 국군과 함께 싸우다가 원주로 철수했다.

 

 


한편, 서울시경은 북한의 남침 첫날인 6월 25일, 전투경찰대를 편성해서 포천으로 급파했다. 그러나 무기조차 빈약했던 입장에서 전투는 불가했다. 인민군이 서울에 진입하자 동대문경찰서는 싸우다가 전원이 전사했다. 전사(戰史)에서는 서울시 내 경찰관들의 1000명 이상이 전사하고, 경기도에서도 경찰 500명이 전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인식한 경찰은 전투경찰로 전환하여 대대별로 500명씩 편성하여 국군과 유엔군에 배속되었다.

미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은 대구로 철수하면서 방어의 중점을 낙동강 방어선에 두고 호남지역 방어는 경찰에게 맡겼다. 군인보다 상대적으로 약한 경찰이 호남지역에서 희생이 많았고 북한군의 진출은 그만큼 빨랐다. 윤기병(경무관) 전북경찰국장은 각 경찰서별로 전투경찰대를 편성하여 전투에 대비했으나 적은 이미 금강을 넘어 7월 16일 청양을 점령했고, 7월 30일에는 인민군 6사단이 하동을 넘어 진주를 향하고 있었다.

8월 1일, 장흥경찰서장 심재순 총경이 전남의 지휘권을 부여받아 여수, 나주, 남원, 화순, 보성, 함평, 영암, 무안, 강진 등의 전투경찰이 합세하여 호남지역 방어에 들어갔다. 그러나 탱크를 앞세워 파죽지세로 밀려오는 적을 막아낼 능력이 없었다. 전남 곡성경찰서장 한정일 경감은 경찰관 200명을 데리고 후퇴하다가 퇴로가 차단되어 산으로 피신, 게릴라전을 전개하며 북한군의 후방을 공격하고 정보를 수집해서 대구로 보냈다. 누구보다 조국을 사랑하고 우국충정에 불타있던 조국의 아들들은 군인이나 경찰이나 모두 이렇게 싸웠다.

8월 25일, 북한군이 진도를 향해 포위 공격하여 들어오는 것을 보고 진도경찰서장 김익수 경감은 옥쇄를 결심하고 백병전까지 치렀으나 결국 중과부적으로 점령당하고 말았다. 9월 14일, 낙동강 방어에 투입됐던 창녕경찰서장 김갑용 경감은 미 24사단과 군경합동작전으로 창녕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한편 서울경찰대는 정부와 함께 대구로 내려가 경북도경, 강원도경의 일부 병력과 함께 7000여 명이 대구방어에 집중 배치됐다. 당시 경찰의 총병력은 1만3000명밖에 안 됐다. 개전 초기에 50%가 전사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경찰병력을 6만5000명으로 증원하기로 하고 7만 명이 사용할 수 있는 무기를 미8군에 건의해서 지원받았다. 그리고 조병옥 내무부 장관은 자진해서 워커 8군사령관에게 경찰 병력을 유엔군에 배속시켜주면 군 작전을 돕겠다고 건의했다. 이 문제는 미 국방성의 승인을 받아 한국 경찰 1만5000명이 NP의 표시를 달고 유엔군에 배속되어 군 작전을 지원하게 됐다. 이무렵 대전을 점령한 북한군은 계속 남하하여 7월 25일 김천으로 향하고 있었으며, 호남으로 우회한 적 6사단은 7월 23일 광주, 24일에는 목포와 여수를 장악했다.

한편, 김일성으로부터 “8월 15일까지 대구를 점령하라”고 명령을 받은 북한군 10개 사단이 경부선을 따라 대구로 향하고 있었다. 적 1, 13, 15사단은 상주를 점령하고 대구로 밀려 들어왔고, 적 8, 12사단은 낙동강 상류인 안동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이때 안동에 진출해 있던 강원경찰과 영월경찰 등 8개 대대를 안동으로 배치하여 군 작전을 도왔다.

 

 


이 무렵 낙동강과 대구방어를 위해 처음으로 군·경 연석회의가 소집되었다. 군에서는 대구 방어사령관 이한림 대령과 참모장 이기건 중령이 참석했고, 경찰에서는 내무부 치안국 비상경비총사령부 참모장 최치환 총경, 동원참모 이성우 총경이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대구방어를 위해 전후방 경비와 치안을 각각 분담키로 했다.

경찰은 최치환 총경의 지휘 아래 ① 군 경력 또는 전투경험이 있는 자는 ‘독립전투대대’를 편성해서 군에 배속하거나 전략거점과 중요시설을 경비하고 ② 전투요원으로 부적합한 자는 각 시·도경국장 지휘 아래 경찰서 단위별로 방위대를 편성 운용에 들어갔다.

한편, 9월 5일 영천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고 상황이 다급해지자 국방부, 육군본부 등 지휘부가 부산으로 이동할 때 8군사령관 워커장군은 경찰도 철수하라고 조병옥(趙炳玉) 내무부 장관에게 말했다. 그러나 ‘대구를 내주면 나라를 내주는 것과 같다. 경찰만이라도 남아서 대구를 사수하겠다’고 주장하며 치안본부는 대구에 남았다. 전투경찰은 한 달 동안 치러진 낙동강 방어전투에서 1만5000명이 전투에 참가, 197명이 전사했다.



경찰 화랑부대, 장진호전투 참전

경찰에도 화랑부대가 있었다. 낙동강 전선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던 1950년 8월 12일, 3년 이상 근무자 중에서 용모가 단정한 300명을 선발하여 ‘화랑부대’라 칭하고 유엔군에 배속시켰다. 대대장은 박정준 총경, 1중대장 이근복 경감, 2중대장 전장한 경감, 3중대장 문학동 경감이 임명됐다. 이들은 부산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인천상륙작전에 필요한 교육을 받고 화랑 1, 3중대는 미 1해병사단 5연대 3대대에 배속되어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했으며, 안양을 소탕하고 수원 비행장을 장악했다. 그 과정에서 탱크 2대 파괴, 포로 100여 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화랑2중대는 미 7사단에 배속되어 인천상륙작전 이후, 동작동에서 한강을 도하, 서빙고를 거쳐 남산을 점령했다. 그리고 미군과 함께 북진하여 1950년 11월 장진호 전투에 참전했다.

전투경찰은 휴전 이후 공비토벌에서도 많은 공을 세우고 1955년 7월 해체됐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부터 북한의 대남도발이 많아지면서 1967년 9월 대간첩 작전을 위한 전투경찰(전경)이 탄생됐다. 이 전경도 2013년 9월 폐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우리 국민은 6·25전쟁과 공비토벌 과정에서 조국을 지키다가 산화한 국립경찰의 희생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배영복 전 육군정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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