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중공군의 참패-용문산전투
중공군은 참전 이후 1~3차 공세에서 대승을 거두고 1951년 1월 5일 서울을 점령했다. 일부는 수원·평택까지 밀고 내려왔으나 유엔군의 반격으로 3월 15일 서울을 포기하고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양수리를 지나 북쪽으로 가평까지 쫓겨갔다.
6사단 장병들 필사즉생 각오 ‘모두 복수전이다’
한때 유엔군의 북진을 저지하기 위해 4차 공세(1951년 2월 11일)를 펴기도 했으나 지평리전투에서 패하고 가평까지 밀려난 것이다. 여기서 중공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제5차 공세에 들어갔다.
중공군의 5차 공세는 1951년 4월 22일에 시작해 5월까지 두 차례 있었다. 4월 공세 때 서부전선 설마리전투에서는 미 1군단에 배속된 영국군 27연대에 패해 남진이 지체됐고, 중부전선에서는 국군6사단을 ‘사창리’에서 만나 승리를 거두고 기세등등하게 남진했다.
6사단은 6·25전쟁 초기, 춘천방어전투에서 유일하게 첫 승리를 거둔 자랑스러운 부대였지만 사창리전투에서는 중공군 4개 사단의 공격을 받고 방어에 실패해 협소한 사창리 계곡으로 밀려 들어갔다가 30%의 병력과 장비를 잃고 후퇴한 바 있다. 사단장 장도영 준장은 부대를 재편성하고 용문산전투에서 만회하려 했다.
용문산(1157m)은 지형적으로 중부지역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춘천·화천·양구로 가는 길목일 뿐만 아니라 감제고지가 높은 지형지물이다. 군단으로부터 용문산 지역을 점령 방어하라는 임무를 받은 6사단은 용문산 정상 주저항선에 7연대와 9연대를 배치하고, 용문산 북쪽으로 죽 뻗어있는 줄기의 427고지를 전초기지로 삼아 2연대를 배치함으로써 방어 편성을 완료했다.
4월 공세에서 승기를 잡은 중공군은 5월 16일부터 5월 공세를 시작했다. 동부전선 현리전투에서는 중공군 60군 예하 3개 사단에 국군3군단이 무너지는 아픔을 겪었다(작전 실패 책임을 물어 3군단 해체, 2년 후 재창설). 중부전선의 중공군은 용문산에서 아군 6사단과 만났다. 중공군은 제63군 예하의 3개 사단(187·188·189사단)과 증원부대 등 5만 명으로 공세를 가해왔다.
6사단 장병들은 필사즉생(必死則生)의 각오로 임했다. 사단장은 2연대(연대장 송대후 중령)에 만회의 기회를 주기 위해 사단의 주저항선인 용문산 북쪽 기슭 427고지에 추진 배치했다. 그리고 2연대 장병들에게 사단에서 모든 것을 지원할 테니 ‘어떤 일이 있어도 진지를 사수하고 사창리의 치욕을 만회하라’고 훈시했다. 장병들은 철모에 ‘결사(決死)’라고 붉은 글씨를 쓰고 항전의 결의를 다졌다. 2연대는 기지 전방 청평호 부근 율업산에 2대대, 북한강 지류인 홍천강 가 왕터산(559m)에 1대대를 배치하고 일전을 기다렸다.
5월 18일 중공군은 2연대가 점령하고 있는 427고지에 사단 전체가 집중된 것으로 오판하고, 427고지를 향해 일시에 총공세를 폈다. 저녁 7시가 되자 북한강을 건너오기 시작했다. 2연대는 강을 건너오는 중공군을 60㎜와 81㎜ 박격포로 사정없이 타격했다.
그러나 인해전술에 역부족이었다. 강을 건넌 중공군은 427고지를 목표로 달려와 그 주변 353고지·장락산·나산 등을 포함하는 큰 포위망을 구축하며 2연대를 압박했다.
역포위 전술, 3일만에 퇴각... 中 1만7177명 전사
용문산 정상에서 이 광경을 목격한 6사단장은 용문산 주저항선에 예비로 있던 7연대와 9연대를 내려보내 중공군의 후방을 역공하면서 오히려 중공군을 외곽에서 ‘역포위’했다. 그리고 지평리에 주둔하고 있던 미 7사단 포병에 지원사격을 요청해 중공군을 가운데 두고 포사격을 집중했다. 중공군의 밀집지대를 강타하니 놀란 오랑캐는 3일 만(5월 21일)에 퇴각하기 시작했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은 1만7177명이 전사했고, 2318명이 포로로 잡혔다. 이에 비해 국군 손실은 전사 107명, 부상 494명, 실종 33명으로 보고됐다. 최소한의 희생으로 중공군 3개 사단을 물리친 것이다. 중공군은 화천 방향으로 퇴각했다. 그러나 화천에는 화천호가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앞에는 화천호, 뒤에는 6사단의 맹추격으로 진퇴양난이었다.
한편 용문산전투의 연장선에서 이뤄진 파로호전투는 이보다 더 큰 전과를 올리고 중공군의 기세를 완전히 꺾어놓았다. 파로호는 화천호의 새로운 이름이다. 화천호에는 화천발전소가 있다. 전력이 부족했던 우리에게 발전소를 확보하는 문제는 대단히 중요했다. 대통령으로부터 화천발전소를 반드시 점령하라는 특명을 받고 국군은 화천을 향해 중공군을 강하게 밀어붙이며 추격해 들어갔다.
연이은 파로호전투 대승… 사창리 치욕 완전히 갚아
북진하는 도중 춘천에서 적을 가볍게 제압하고 화천까지 올라갔다. 발전소를 장악하기 위한 화천전투는 5월 27일부터 아군의 공격으로 시작됐다. 미 24사단과 미 7사단을 좌우로 배치하고 중앙에는 국군6사단이 주축이 돼 공격에 들어갔다. 퇴각하는 중공군을 추격했기 때문에 공격이 쉬울 줄 알았다. 그러나 화천에 도달하니 적의 방어태세가 너무 강했고 다 파괴된 것으로 보였던 탱크도 많이 나타났다. 한 달 전 현리전투에 참가해 아군에게 큰 피해를 주었던 중공군 제60군 예하 180사단과 제20군 예하 58사단이 이동해서 화천방어 편성에 합세했기 때문이다.
국군과 유엔군은 우선 미 공군의 지원을 받아 적의 탱크를 파괴했다. 미군은 도로와 개활지를 통해 추격했고 국군6사단은 산악을 넘으며 추격했다. 이번에도 6사단에서는 2연대가 선두에 섰다. 27일 아침 7시 일제히 공격을 시작했다. 산악공격이라 탄약운반 등 어려움이 많았지만, 중공군에게 노획한 ‘노새’를 이용해 전진했다.
마침내 발전소 부근까지 온 29일 새벽 3시30분, 2연대는 3대대를 선두로 발전소를 포위, 공격해 들어갔다. 중공군은 올 것이 왔다고 포기했는지 큰 저항 없이 포로로 잡혔다. 아군은 퇴각하는 중공군을 계속 압박했고, 지휘체계가 붕괴한 중공군은 퇴각 도중 미 공군의 폭격으로 죽고, 화천호를 건너가려다 2만3000명이 익사했다. 이 작전으로 6사단은 4월 공세 때 당한 치욕을 완전히 갚아주는 대승을 거두었고, 방어선이 60㎞나 전방으로 북상했다.
13일 동안 중공군 총 4만1300여 명 전사
이승만 대통령은 장병들을 치하했고, 화천호 이름도 ‘오랑캐를 물리친 곳’이라는 뜻의 파로호(破虜湖)로 바꿨다.
용문산전투와 파로호전투로 이어지는 13일 동안 중공군은 총 4만1300여 명이 전사했다.
중공군은 이 참패의 순간을 어떻게 기록했는지 찾아보았다. 그러나 기록을 남기지 않고 모두 숨겼다. 다만 공식 기록인 ‘중공군의 한국전쟁사’에서 ‘9병단의 주력은 화천 산양리에서 김화의 동쪽 지구로 철수, 휴식에 들어가 정비한다’라고만 돼 있었다.
<배영복 전 육군정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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